양경언의 시동詩動걸기
김현, ‘두려움 없는 사랑’(<문학3> 창간호, 창비, 2017)
여기,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 이부자리를 마련하고, 옆 사람의 얼굴을 살피는 사람이 있다. 언뜻 평범한 삶의 한 귀퉁이인 듯하지만, 한국 사회의 변동 속에 놓인 요즘의 우리는 (혹은 변화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기로에 놓인 우리는) 안다. 하루를 잘 정리해서 평안하게 잠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긴장과 갈등과 고민을 견뎌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삶의 제반적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그러니 그 시간을 다 통과해서 제 몸을 잘 누이는 때를 맞이하는 일에 차근차근 의미를 부여하는 이가 있다면 (혹은 그런 나날을 애틋해 할 줄 아는 이가 있다면), 이는 그이가 특별히 감성에 치우쳐 있어서가 아니다. 매일의 시간이 보다 더 나은 시간이 되기를 기다릴 줄 알아서다.
“약속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손을 놓고/ 마음을 정리한 후에 이불을 덮어주고/ 기다리는 것으로 인생은 정리되기도 합니다// 어제였던가요?/ 당신이// 꿈나라에서 데리고 온 작은 개를/ 언덕도 없고 레몬나무도 없는 배 위에 올리고/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바다가 너무 넓어 건널 수가 없어요/ 배를 주세요/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배를/ 둘이 노 저어 갈게요 내 사랑과 내가//…(중략)…// 박근혜 대통령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든다고 했어/ 말해주자 당신이 여느 때보다 더 크게 웃다가 그만/ 오줌을 쌌지요/ 그렇게 다시 당신이 뜨거운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을요// 바다에 간 적도 있잖아/ 뽀송뽀송한 새 바지를 입고서/ 광어회를 먹으며 불꽃놀이를 보는데/ 너무 가까워서/ 순식간이라는 걸 알아버렸지/ 산다는 건 당신이 말했지요//…(중략)…// 당신이 성실한 사랑의 냄새를 맡고 싶다고 해서/ 제가 당신 손을 꼭 잡아주었는데/ 이 짧은 걸 하려고 사람은 오래도 사는구나”(김현, ‘두려움 없는 사랑’ 부분)
시에서 ‘나’는 너무 넓어 건너갈 수 없는 바다를 막막해하는 대신, 자신의 자리에서 배를 띄워 노를 저어가는 방법을 강구하는 사람이다. 영원과 영광을 거머쥔 척하는 것보다 ‘당신’과 함께 여기의 삶을 잘 일구는 편이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깊이 느끼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불꽃놀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질 삶에 매 순간 “성실”함으로써 자괴감에 발 묶이지 않는 것, 옆에 있는 ‘당신’의 손을 지키기 위해 내 삶을 통째로 바치기도 하면서 역으로 내 삶이 통째로 바쳐지는 그 순간만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님을 아는 것, “이 짧은 걸” 하기 위해서라도 “살아 있”는 것. 이를 안다면, 오늘 우리가 쓸모없는 하루를 보낸다 해도 그것이 값지지 않다고 함부로 말할 순 없다. 삶을 감히 비웃을 수 없다. 이를 모르고 통치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채 영원의 영광만을 꿈꾸는 대통령이 자기변명만 늘어놓는 상황은 얼마나 우스운가.
이 시를 읽다가 나는 문득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 급진적이어야 한다는 주문을 서로에게 채근하듯 전하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을 차근차근 살피면서, 곁에 있는 소중한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 여기를 반으로 쪼갤 수 없음을 아는 일임을 알았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두려움 없는 나중도 없는 것이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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