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원근의 출판 풍향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는 ‘책을 통해 꿈과 희망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한국구세군 및 나주시와 ‘사랑의 도서기증사업’ 행사를 1월 중순에 두 차례 열었다. 송인서적 부도 사태 직후의 일이다. 이 사업은 예술위가 2011년부터 한국구세군과 협력하여 국내 출판사에 쌓여 있는 재고 도서를 활용해 출판사에는 세제 혜택을 부여하고 문화 소외계층(지역아동센터, 사회복지시설 등)에게는 기증된 도서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시행되어 왔다.
예술위는 2016년의 경우 약 70개 출판사가 참여하여 31만여권의 도서를 기증받아 전국의 사회복지기관, 작은도서관 등에 배포했다. 총 26억원(정가의 70% 추산)에 상당하는 도서 물량이다. 2016년에는 예술위가 위치한 나주시와 협력해 5만6천권 정도의 책을 나주시 지역아동센터 등 사회복지기관에 우선 지원했고, 대기업 후원으로 병영도서관 설립도 지원했다고 밝혔다. 2015년에 48개 출판사가 참여해 18만여권(약 14억원 상당)을 기증한 것에 비해서도 상당한 증가세다.
소외계층에게 책을 전한다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수요자들이 원하는 책이 아닌 불특정하게 기부된 책이라는 점이다. 당사자들이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안 팔려 기증받은 책이 소외계층에게 얼마나 큰 만족을 줄 수 있을까. 수요자 맞춤형이 아닌 시행기관 맞춤형 사업이다.
예술위는 문화예술 발전과 진흥을 위해 운영하는 공공기관이다. 지난해 예산이 447억원이었다. 문화예술 발전의 바탕이자 그 결과물이기도 한 출판물의 사회적 확산과 출판산업 진흥에 도움이 되도록 문화 소외계층이 필요로 하는 책을 많이 구입해서 널리 보급해도 부족할 판국에, 어려운 출판사들에게 세제 혜택을 빌미로 기증을 요청하는 일은 멈춰야 한다. 취지와 명분이 좋아도 돈 안 들이고 생색만 내려는 방식은 당장 그만두길 바란다.
예술위뿐만이 아니다. 상당수 공공도서관에서는 시민들에게 여전히 도서 기증을 요청하고 있다. 전국의 작은도서관, 군대 병영도서관의 대부분도 기증 도서 의존도가 매우 높다. 가계의 도서 구입비가 어김없이 매년 줄면서 저자와 출판·서점계가 모두 울상인 마당에, 공공기관들까지 나서서 기왕에 안 팔린 책이니 기증이나 하란다. 잔인한 공공 코미디다.
책 생태계는 저자, 출판사, 출판유통사, 서점, 도서관, 독자 등이 서로 긴밀하게 연계된 유기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은 생산-유통-소비를 통해 건전한 재생산 구조를 이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실상은 그렇지 않다. 책 생태계 전체가 일그러져 개선해야 할 것투성이다. 공공기관들이 민간에 책 기증을 요청하는 정신 나간 짓부터 고쳐야 한다. 책으로 좋은 일을 하려거든 제발 구입해서 하기 바란다. 공공기관들이 앞장서 책 생태계를 고사시키는 나라에서는 출판은 물론이고 나라의 비전을 생각하기 어렵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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