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걸기
박소란, ‘천변풍경’
덴마크의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에서 책 속에서만 보던 자코메티의 작품 <걷는 사람>을 직접 접했을 때, 기묘한 기분이 들었던 생각이 난다. 메마른 사람 형상의 그 작품은 걷는 자세를 취한 채 멈춰 있었다. 그 근처를 서성이면서 저 자는 밤낮으로 내내 같은 자리에서 걷되 걷지 않는 모습으로 있겠구나 싶었다.
걷되 걷지 않는 삶. 우리가 애써 발버둥 친다 해도 쉽게 삶의 곤혹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이런 형국과 엇비슷해서가 아닐까. 우리는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걷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방식으로 걸을 때도 있어서 걸으나 진전이 없고 진전이 없어서 또 걷는 악순환에 빠져들 때가 많다. 그야말로 걷는 저 자신에게만 몰두하여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왜 가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할 때를 자주 맞닥뜨린다는 얘기다. 폐쇄적인 틀에 스스로를 모순된 형태로 가두는 일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자주 저지른다.
그러므로 잘 걷는 일도 쉬운 게 아니다. 걷는 사람이 택한 ‘걷지 않는’ 모습을 일컬어 단순히 진전이 없는 상태라 여기지 말고, 잘 걷기 위해 이모저모 방향을 살피고 다른 이들의 동작을 헤아리며 누구와 함께 걷는지, 왜 걷는지를 따져 묻기 위한 시간 동안 취하는 자세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걷되 걷지 않는 방식으로 걸음을 지연시키는 일은, 본래부터 정합적이지 않은 삶을 버텨내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걷고 있다 힘차게 팔을 흔들며/ 오고 가는 풍경/ 이 속에 나는 있다/ 지금은 안심할 수 있다// 나는 걷고 있고 그러므로 살고 있다// 자전거에 오른 연인이 둥글게 둥글게 달려간다/ 물 위로 사뭇 흩뿌려진 웃음의 경적, 몸을 씻던 해오라기 몇 푸드득거리며 새를 흉내 내고/ 살아 있는 것, 억새처럼/ 흰 것 가느다란 것/ 자꾸만 동작하는 것// 지금은 알 수 있다/ 나는 걷고 있고 그러므로 살고 있다 힘차게 팔을 흔들며// 개천은 흐른다/ 나는 계속 걸어갈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 다시 걸어올 것이다// 살아 있는 것 우측보행을 하는 것, 무심코// 바닥에 말라비틀어진 지렁이를 밟는다/ 이 어줍은 것/ 불현듯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해도 가벼운 목례로써 앞질러 종종종 멀어진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는다/ 건강하므로 지금은 건강할 것이므로”(박소란, ‘천변풍경’ 전문)
“걷고 있고 그러므로 살고 있다”는 시인은 그러나 자신의 동작이 “지금”에 한정된 것임을 알고 있다. 걷고 있을 때, 그러므로 나의 운동성을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 실감할 때, 이 상태가 영원하리라는 손쉬운 전망으로 건너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걸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살아 있는 조건들을 헤아리는 방법. “둥글게 둥글게”, “사뭇”, “힘차게”와 같은 역동적인 부사들을 만끽했다가, “무심코” “불현듯” 나타난 우연들에도 나름의 발랄함으로 응대하는 방법. 진전을 방해받았다고 분노하기보다는 걷고, 걷지 않는 모든 일들에 저마다의 의미가 있음을 이해하는 방법. 올해는 이런 방법으로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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