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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따뜻한 분노의 작가 존 버저

등록 2017-01-19 18:50수정 2017-01-19 18:59

정혜윤의 세벽세시 책읽기
랑데부
존 버거 지음, 이은경 외 옮김/동문선(2002)

내가 과연 이 사람을 한번이라도 만나볼 수 있을까, 꿈만 꾸던 작가 존 버저가 생을 마감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새 글을 볼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내 영혼은 빈곤해진다. 그는 특별한 안정감을 내게 주었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이 지상 어딘가에 있는 한 세계의 나쁜 일은 줄어들 것이고 부드러움은 늘어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사람이 그의 글을 읽으면 용기를 얻게 되고, 다정한 마음을 가졌지만 외로운 사람이 그의 글을 읽으면 마침내 친구를 찾았다고 느낄 것이다.

지금 쓰는 이 글은 죽음과 상실로 시작했지만 사랑으로 끝날 것이 틀림없다. 그의 모든 글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자본가와 정치 시스템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을 때조차 기묘할 정도로 사랑하고 싶은 감정을 자극하고, 부드럽게 품을 파고들고 어깨를 끌어안는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삶 속에 있는 신비로운 요소에 깊이 감동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네나 세잔, 고야나 자코메티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좋은 글을 썼지만 모네, 세잔, 고야, 자코메티가 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좋은 글을 썼다. 그는 재주가 아주 많았다. 죽은 사람과 말할 줄 아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고, 너무나 가진 것이 없어서 영혼만은 꼭 남겨두었던 사람들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고,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성스러움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벤투의 스케치북>에 쓴 한 문장은 존 버저 자신에게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자아’ 혹은) ‘자화상’의 ‘자’(self)는 명사이기를 그치고 전치사 ‘향해서’(toward)의 역동성을 획득한다.” 그의 시선은 늘 더 많은 사랑과 축복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그 방향을 탐색중이었고 바로 그 시선이 존 버저를 존 버저로 만들었다.

지난주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예술인들을 태운 버스가 세종시로 향했었다. ‘조윤선 사퇴’를 요구하는 예술인들의 뜨거운 분노가 세종시의 춥고 황량한 거리를 에워싸는 동안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 누구도, 단 한명도 정부 청사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거기가 바로 존 버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다.

“용감한 사람들이 모욕을 당할 때, 고결한 것이 모멸을 당할 때,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이성과 모든 탄원에 귀 막고 있을 때… 우리가 소중히 간직하는 ‘부드러운’이라는 단어야말로 그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말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 나는 권력을 쥔 자들이 무슨 형태의 예술이든 예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예술은 인생의 야만성이 정당화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단결을 합당한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궁극적으로 정의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 이와 같은 기능을 할 때 예술은 지속적인 배짱과 명예가 만나는 장소가 된다.” (존 버거, <랑데부>, ‘광부들’에서 인용)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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