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원근의 출판 풍향계
그냥 책이 잘 안 나가는 정도가 아니다. 출판시장 침식의 심화로 이제 상당수 출판사들이 경영 한계에 직면해 있다. 특히 대학교재를 주로 발행하는 학술도서 출판사들은 1종당 평균 1천부, 적게는 수백부밖에 발행하지 않지만 이조차 판매가 수월치 않다.
대학가의 불법 복제도 여전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올해 상반기에만 1만7391점(284건)의 불법 복사물을 압수했다고 발표했다. 학술도서 출판사들은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서 1권씩만 구매해도 숨통이 트일 것이라 바라지만, 도서관들은 자료구입비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학생들 사이에는 종이책 교재를 스캔(복제)하여 태블릿피시에서 이용하거나 공유하는 ‘북 스캔’이 유행하며 불법 복제업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교수들은 학생들을 위한다며 ‘빅북 운동’을 벌여 재능기부로 만든 책의 파일(PDF)을 무료 배포하거나, 교재를 거의 쓰지 않고 파워포인트로만 강의한다. 이래저래 대학 교재를 비롯한 학술출판은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저작권법도 출판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현행 저작권법은 수업 목적 저작물 이용, 수업 지원 목적 저작물 이용, 도서관에서의 저작물 이용, 교과용 도서에 저작물을 게재한 경우 등에 대해 저자(저작권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저작물 이용자인 대학, 교육청, 도서관, 교과용 도서 제작자 등이 한국복제전송저작권협회에 보상금을 납부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보상금은 저자에게만 해당될 뿐 출판사와는 무관하다. 갈수록 도서의 무상 이용과 보상금이 늘어나는 환경에서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출판사는 원천 배제된 형국이다.
출판계는 저작권법 규정으로 출판사(출판자)에게 ‘판면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판면권은 판면(책의 편집된 페이지)을 만들기 위해 출판사가 기획과 원고 정리, 편집(레이아웃·교정·교열), 제작에 기울인 노력의 결정체에 ‘저작인접권’ 같은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악보의 음악이라도 연주자에 따라 작품은 달라진다. 저작권법은 저작권자인 작사가와 작곡가뿐만 아니라 연주자, 가수, 배우, 지휘자 등 실연자들에게도 ‘저작인접권’을 부여하며, 그 권리는 70년간 보호된다. 음악을 일반 공중이 향유하도록 매개하는 데 기여한 실연자들의 노력과 능력을 대우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출판(어문 저작물) 분야의 경우 원고를 쓴 저자의 권리는 인정되는 반면 기획, 교정·교열과 편집 디자인, 제작에 공들인 출판인의 권리는 보호 대상이 아니다.
복제와 전송이 일상화된 디지털 환경에서는 판면권이 더욱 필요하다. 영국을 필두로 영연방 국가들과 중국, 대만 등에서는 판면권을 도입한 지 오래다. 현재 출판계에서는 노웅래 의원(더불어민주당)의 대표발의 형태로 저작권법 개정안을 준비중이다. 저자와 독자를 매개하는 출판사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판면권 도입에 지지와 성원이 필요하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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