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걸기
안미옥 ‘아이에게’
‘304 낭독회’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작가와 시민이 함께 만드는 낭독회의 이름이다. 2014년 9월에 시작해서 지난주 토요일에는 스물일곱 번째 순서를 맞이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하는 지금의 개최 속도를 따져본다면, 이 낭독회는 목표한 304회를 채울 때까지 20년은 족히 넘게 이어질 예정이다.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낭독회를 꾸리는 이들은 어느 정도 각오한 바다. 20여년의 시간은 살아 있는 자들이 오롯이 짊어질 몫이기 이전에 304명이 살아 있었다면 그이들의 이름으로 쓰일 역사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었다면, 그이들은 긴 시간 동안 각자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꾸려갔을 테다. 우리는 그이들의 목숨뿐 아니라 그이들로 이룩될 미래 역시 잃었다. 그 상실을 회피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다.
그런데 요즘, 우매한 통치자와 그 주변을 기웃거리며 제 목숨을 연명하려는 작자들이 우리 앞에 놓인 긴 시간을 독차지하겠다고 벼르는 상황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그들은 304명이 돌아오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또 다시 많은 이들의 미래를 빼앗는 일에 골몰한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304명에게 주어졌어야 할 20여년의 시간이 유달리 사무친다. 분노와 슬픔을 어떻게 가눌지 모르겠는 상태로 참석한 스물일곱 번째 ‘304 낭독회’에서 안미옥 시인의 ‘아이에게’ 전문을 들었다.
“모았던 손을 풀었다 이제는 기도하지 않는다// 화병이 굳어 있다/ 예쁜 꽃은 꽂아 두지 않는다// 멈춰 있는 상태가 오래 지속될 때의 마음을/ 조금 알고 있다// 맞물리지 않는 유리병과 뚜껑을/ 두 손에 쥐고서// 말할 수 없는 마음으로 너의 등을 두드리면서// 부서진다/ 밤은 희미하게// 새의 얼굴을 하고 앉아/ 창 안을 보고 있다”(‘아이에게’ 전반부)
화자가 자신의 위치를 ‘“멈춰 있는 상태”가 지속되는 공간’ 밖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위 대목까지 들었을 때, 나는 상상했다. 창밖 해질녘의 빛이 거리 위 사람들의 손으로 옮겨가는 장면을. 위의 시에는 결박되었던 손을 풀어 캄캄함을 짚기 시작한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시가 낭독된 날 저녁에는 광장에서 촛불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통치자에 의해 ‘멈춰버린’ 삶들이 그 막혀 있음을 참지 못하고 쏟아져 나올 광장이 가까이에 있었다.
“노래하듯 말하면 더듬지 않을 수 있다/ 안이 더 밝아 보인다// 자주 꾸는 악몽은 어제 있었던 일 같고/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를 듣고 있을 때// 물에 번지는 이름/ 살아 있자고 했다”(‘아이에게’ 후반부)
우리가 초를 들고 광장을 채울 때, 어제의 악몽은 멀어지고 그간 우리의 혀를 잠들게 했던 결박도 끊어진다. 거기에는 얼굴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분노에 힘겨워 하거나 마냥 허탈해 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함께 모여 따뜻한 기운을 지필 줄 아는 이들의 얼굴이. 거기에서 밤은 희미해질 거였다. 생존을 넘어 ‘살 만한 삶’을 향한 희구가 제각기의 음역대로 노래하듯 이어질 거였다. 그러니, 우리가 더듬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우리의 이름으로 어엿하게 살아 있자는 다짐이 오래도록 번지는 때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이”를 향해 쓰인 시를 들으며, 새삼 그것을 실감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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