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걸기
시를 읽는 순간 우리는 여간해선 잘 들리지 않는 말들 사이에 선다. 거기를 떠나지 않고 ‘잘 알지 못하는’ 말들을 거부하지 않을 때야 독자인 나는 용감하게 이해의 진폭을 이동시킬 수 있다. 정해진 답이 없으므로 나는 나를 끊임없이 변화시켜 언어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러는 사이에 시는 다른 현실을 창안한다. 쏟아지는 뉴스 더미에 정신을 못 차릴 요즘인데, 신문을 펼친 ‘독자-당신’에게 시를 읽자고 하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했다.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능동적인 청자가 된다. 오늘이 어제와 어떻게 다른지 질문하는 연습은 시와 독자 모두에게 부여된 일이겠다. ‘시’라는 프리즘을 마음에 올려두고 잠깐 있자.
“내가 아, 하고 말하면/ 너도 아, 하고 대답했는데// 네가 오, 하고 말하면/ 나도 오, 하고 대답했는데// 우리의 대화 이후/ 사라지지 않는 것은/ 점점 커져가면서// 비가 오면 비를 맞는다/ 입을 아아, 벌리고 비를 맞는다/ 입을 오오, 벌리고 비를 맞는다//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서/ 하늘로 올라가는 이파리들은/ 뿌리가 가고 싶은 곳과는 상관없이// 나의 손이 네 몸에 손자국을 남겼는데/ 너의 머리카락이 나의 머리카락과 엉켰는데//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서/ 아무렇게나 자란 열매의 씨가/ 나의 소식이 닿지 않는 곳에 떨어진다// 비가 오면 비를 맞는다/ 바람이 불어 키가 자라나고// 빈 화분을 반짝 들어/ 거리에 내놓는 눈동자 속으로/비가 그쳤다는 듯 쏟아지는/ 햇빛, 햇빛”(하재연, ‘잔여물들’).
시에서 ‘너’는 ‘나’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소리를 내어본다. 분명 부름과 응답이지만, 들리는 소리가 유사하다. 이 소리가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너’의 소리가 ‘나’를 앞질러나가 미리 생각을 마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같은 자리에서 “비”를 맞으며 서로를 지켜준다. 물론 이렇게 출발한 말은 어디로 향할지 모르고 그 말들이 설혹 “나의 소식이 닿지 않는 곳”으로 건너갈지라도, 그 말이 사라지지 않도록 믿음을 실어 준다면 거기에선 내가 모르는 이름의 싹이 자랄 것이다. 비가 그치면 햇빛도 들어설 거다. 말하는 이가 지금껏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얘기를 용기 내어 할 때, 그리고 그것이 품은 온갖 색채를 적극적으로 듣는 이가 곁에 있을 때, 대화는 “사라지지 않는 것”을 남긴다. 여기에서 화자나 청자는 모두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정치적으로 평등을 실현하는 상황의 능동적인 참여자가 된다. 최근 에스엔에스(SNS) 상에서 시작된 성폭력 생존자들의 증언에 몸을 기울이면서 가졌던 변화에의 예감도 이와 같다.
말에 마음을 다 쏟고 나면, 이전보다 더욱 비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비참은 생의 한가운데에서 솟는 ‘참’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 글은 말을 꺼낸 이후의 상황이 또 다른 생채기를 낼까 잠 못 이뤘던 이들을 떠올리며 썼다. 내가 ‘아’ 하고 말했을 때 ‘아’ 하는 누군가가 곁에 있어 그 말이 저 스스로 근육을 입을 수 있다면, 그렇게 될 때까지 ‘아’라는 씨앗에 믿음을 실어준다면, 바뀐다, 틀림없이. 대개의 거대한 변화는 그러는 사이에 온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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