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걸기
서울대병원 측이 고(故) 백남기 님의 사인을 주치의의 판단에 따라 ‘병사’에 무게를 실어주는 기자회견을 한 직후에 이 글을 쓴다. 나는 의학지식이 전무한 사람이지만 그 자리에서 생명을 평등하게 다뤄야 할 자들이 자가당착적으로 굴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잘 알겠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누구나 ‘그날’ 경찰이 ‘물대포’라는 무기로 한 사람을 집요하게 공격한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는 말은 없다. 뿐인가. 그런 국가도 없다. 그날의 사실을 목격한 국민의 눈을 가리려는 국가만 있을 뿐이다. 이런 일이 이 나라에선 도대체 몇번짼가. 사건 당일에 물대포를 부여잡았던 경찰의 눈 역시도 감겨 있었을까. 자신들이 두려워해야 할 게 무엇인지조차 구분하지도 못한 채, 병원 측이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선 ‘외압은 없었다’고 ‘자발적으로’ 말했다 생각하니 더욱 답답하다. 허수경의 시 ‘포도나무를 태우며’를 읽는다.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포도나무를 태우며’ 부분)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포도나무는 신이 내리는 행복과 풍요, ‘선택받은 사람들’을 상징했다. 지금 사회를 함께 꾸려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포도나무’라는 말에 포개어 볼 때, 위 시의 상황은 모두의 숨이 쉬어지지 않는 비참한 사태를 지시하는 것 같다. 포도 농사를 지어본 이들은 안다. 포도나무의 키는 대체로 애매해서 바닥에 주저앉지도 무릎을 곧게 펴지도 못하는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의 자세를 취해야만 열매 수확이 가능함을. 달리 말해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 있을 때야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살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란 뭔가. 포도나무는 어쩌다가 숨을 멈췄나.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포도나무를 태우며’ 부분)
숨을 멈춘 포도나무가 버림받고 타들어가는 시간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목이 쉬도록 곡을 한다 해도, 삶과 죽음의 사이를 겪어내는 시간은 결코 간단치가 않다. 그러나 창공에 오르지 못하는 연기가 울분이 되어 번져가는 속에서도, 시침을 떼고 포도나무의 재를 제 손아귀에 쥐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겐 죽음만큼 삶도 간단히 취급되므로,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이 “술 없는 음복”이나 하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포도나무 태우는 일을 거드는 자여, 제대로 말하라. 누구를 위한 ‘진정성’인가.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이 이토록 초라한가. 어디선가 “가을달”은 지고, 술을 올리지 못하는 마음만 더불어 타들어가는 것 같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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