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 걸기
대학생 시절, 틈이 날 때마다 서울 신촌역과 합정역 사이를 걸었다. 어떤 계절에는 굳이 홍대역 부근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나는 그 근방 특유의 공기를 사랑했던 듯싶다. 일부러 그곳에 감으로써 나 자신을 예술을 향유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처럼 여기려던 허영도, 내겐 있었을 거다. 골목 사이에 있던 헌책방에 들렀다가 친구의 지하 자취방을 끼고 가면 베케트의 연극을 자주 무대에 올리던 극장이 나왔고, 조금 더 걸어가면 모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유명세를 치렀던 음반가게와 놀이터 옆 공중전화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좁고 허름한 공연장들이 꽤 남아 있어서 그곳으로 악기를 짊어지고 들어가는 이들도 자주 보였던 것 같다.
여기까지만 적으면 특정 장소를 다소 낭만화한 방식으로 소환하는 것 같아 조심스러운데, 당시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의 눈에 그 모든 풍경이 이국적으로만 다가왔던 건 사실이다. 남루한 현실이 거기에도 있었을 테지만 그곳을 애써 새로운 문화가 넘치는 자리로 치부한 걸 보면. 그러나 젊음이 가득한 동네라고 내가 신나게 매료되었던 중에도, 그 거리는 서서히 자본에 잠식되고 있었다. 마음껏 풍경을 소비하던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 그때 내가 즐겨 찾았던 가게들이 대체로 남아 있지 않게 되리란 걸. 자주 걷던 그 길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했던 표현 중 현재진행형으로 쓸 말은 별로 없게 되리란 걸.
거대한 자본이 내세우는 현란한 간판들로 가득 찬 최근의 신촌역과 합정역 사이를 걸으며, 풍경이 좀처럼 누설하지 않으려는 과거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곳뿐일까. 거대한 흐름에 쫓겨나는지도 모른 채 불쑥 밀려나 버린 삶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름의 이야기를 품고 살아가는 거리 위에서, 보들레르 흉내를 내며 옛 삶과 현재 삶의 간격에서 상처를 받는다고 말하는 건 어쩐지 좀 지나친 걸까.
“잉어찜을 먹었다 잉어는 아주 컸고 어제까지도 물속을 헤엄쳐 다녔을 거라는 건 생각하지 않았고 저수지의 깊은 물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 내린 비로 물이 불어 잠긴 낮은 지대의 집들과 지붕들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곳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 // 등 푸른 생선을 먹을 때도 먼 바다를 생각하지 않았고 커피를 마실 때도 커피농장과 그곳의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닭을 먹으며 새들을 생각하지 않았고 소를 먹으며 돼지를 먹으며 생각이란 걸 하지 않았고 먹고 또 먹었다”(강성은, ‘낙관주의자’ 부분)
시인은 추방된 사유를 불러와 이미지의 맥락을 확보한다. 그럴수록 뚜렷해지는 우리 일상의 실체란, 단절의 선을 긋고 선정적으로 새로움을 쫓느라 습관적으로 낙관을 일삼는 자본의 속성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생각하지 않”을 때, 무심히 저지를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왜 이 시를 서늘해진 심정으로 읽고 있나. 이미지를 단면적으로 사고하라고 종용하는 시대가 끝내 덮지 못하고 누설하는 사실은 무엇인가.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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