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걸기
내가 누구든, 어떤 일을 하든, 노동은 끊임없이 사람을 경계선(境界線) 위에 세운다. 노동현장에서는 보편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특수하게 애매한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는 얘기다. 직속상관에게 물어볼지 혹은 내 판단을 믿을지부터 시작해(이 경우 현장의 선배들은 무조건 선배에게 물어보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선배들이 일궈온 시스템이 특정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고 그것을 가시화할 필요성이 후배에 의해서만 제기될 때 상황은 더욱 난감해진다) 일하는 공간의 이해를 따를지 아니면 개인의 이해를 따를지까지(어떤 경우는 개인의 이해를 대변하고 상황에 대해 함께 논의할 만한 조직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일하는 사람이 겪는 갈림길의 종류가 워낙 다양하여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문제가 만들어지는 건 대체로 구조 탓이나, 그 안에서 행동을 취하고 결과를 감당하는 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하는 사람의 곤혹은 언제나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직원이 될 수도 있었고 직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직원은 먼저 와서 쳐다보는 사람인데// 당신은 직원이오! 말해주는 사람 없이도 창문 닫을 시간이 되면 직원이 되어 있었다.// 창문이 창문에게 건넨 귓속말로 복도는 길어지고 혼자 남아서 창문 닫는 직원은// (…) // 양쪽을 잡아당겨 주르륵 쏟아지는 높이를 세우면// 새들이 날아와 부딪쳤다. 질끈 눈을 감는 사이로 들어간 새들과 들어가지 못한 새들이// 안과 밖을 나눠 가졌다.// 옆이 있다고 믿으면서 옆을 밀고 나가면 떨어지는 높이였다.// 나가려고 했다면// 바람에게는 얼마나 안전한 높이인가. 직원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쳐다보는 사람인데// 창문을 닫을 수도 있었고 닫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임승유, ‘직원’ 부분)
시에서 일하는 사람이 서 있는 경계선의 상황은 창문이 열리고 닫히면서야 구획되는 “안과 밖”으로 표현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직원’은 누가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인의 임무인 창문을 닫는 행위를 함으로써 비로소 노동자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의도한 결과만 낳는 게 아니라 ‘새들’을 편 가르는 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아무래도 “먼저” 오거나 “마지막까지” 남아야 하는 그 자리가 결국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을 낳는다는 걸, ‘직원’ 역시 눈치챈 듯싶다. 이를 직원의 탓이라 몰아세울 순 없다.
어떤 이는 일은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며 ‘하면 피곤해진다는 게 그 증거’라고 말했다지만, 일하는 이에게 긍지와 고양의 순간을 안김으로써 삶을 지탱하는 역할 또한 노동이 담당한다. 일은 유희와는 달리 삶다움의 지표와 직결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같은 노동의 효과가 존중받지 못할 때 일하는 이의 곤혹은 심화되는 것 같다.
시에서 지금 필요한 건 ‘당신은 직원이오!’와 같은 관리자의 당부가 아니다. 구조의 폭력이 폭로되지 않을 때 상황은 반복될 것이다. “창문”이 부디 다른 의미로 읽혔으면 좋겠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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