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걸기
서울로 이사한 뒤 적응이 제일 까다로웠던 장소가 지하철역이었다. 표는 어디에 넣는지 개찰구에서 헤매기 일쑤였고, 환승할 때는 방향을 확인하느라 내내 노심초사였다. 그러나 지하철역은 어려움만큼 흥미로운 곳이기도 했다. 여럿이 비슷한 눈높이로 핸드폰을 확인하는 모습이나, 막 걸음을 뗀 아이에게 누군가가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 이른 아침 단정히 차려입은 이들이 허둥지둥 계단을 오르는 모습 등 사람들의 움직임이 그곳에선 꽤 구체적으로 보였다. 그럴 때면 나도 이 도시의 삶에 동참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지하철역은 도시가 은폐하려는 풍경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휠체어가 다니기에 난감한 계단이 눈에 띌 때마다, 어떤 이의 이동권은 제대로 보장되지 못함을 실감한다. 맞춤법이 틀린 글자를 내밀며 도움을 청하는 이들, 종이상자로 만든 담을 세워 잠을 청하는 이들과 만날 때면 이 도시가 끝내 숨기지 못하는 저마다의 사연, 이 도시가 해야만 하는 어떤 몫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도시의 민낯은 지하철역사에 있다.
“역사 외벽에/ 고장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몇 개의 격언이 새겨져 있다// 천천히 읽는다/ 무언가를 결심하는 표정으로//(중략)// 격언은 단호하고/ 순식간에 희망을 선사한다// 열차를 기다리며 중얼거린다/ 이 문장을 다시 만날 때/ 평화로운 역사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경기를 일으킬지도 모른다”(유병록, ‘역사(驛舍)의 격언’ 부분)
숱한 사람들이 오가는 역사 근방에서 시인은 홀로 생각에 잠긴다. 열차를 기다리는 곳에 쓰인 격언 때문이다. 이런 격언은 대개 그곳을 매일같이 드나드는 또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 삶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쉽게 희망을 진단한다. 마치 그 격언만 외면 좋은 세상이 온다는 듯이. 시인은 그것을 기만이라 느낀다. 격언의 잘못이 아니라면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이 잘못되어 희망을 속단할 수 없나. 격언은 무엇을 모른 척하려는가. 유병록 시인이 던지는 물음에 심보선 시인의 최근 시가 절규로 응답한 것 같다. 우리는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현장에 수많은 이들이 부착한 애도의 포스트잇 물결 사이로, 다음의 시를 읽을 수 있다.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 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 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중략)// 소년이여, 비좁고 차가운 암흑에서 얼른 빠져나오렴/ 너의 손은 문이 닫히기도 전에 홀로 적막했으니/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나는 그를 향해 최대한 손을 뻗었다고.””(심보선, ‘갈색 가방이 있던 역’ 부분)
지하철역의 일상을 위해선 쉴 틈 없이 일하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그이들은 홀로 열차를 운전하고, 홀로 계단을 청소하며, 홀로 스크린도어를 고친다. 그이들이 있어 도시의 성원은 매일같이 안전하게 움직이지만, 정작 많은 사람을 위해서라는 명분에 따라 그이들은 ‘없는 사람’이 된다. 이 도시의 역사(驛舍)는 그이들의 역사(歷史)를 지우기에만 급급하다.
구의역에서 나부끼는 포스트잇들과 슬픔으로 쓰인 시 편에 서서 생각한다.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을 외롭게 두지 않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 누군가를 보이지 않게끔 만드는 사회란 정당치 않다고 말하기 위해, 앞으로 우리가 써야 할 역사(歷史)는 무엇인가 하고.
양경언/문학평론가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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