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걸기
“최대한 늦게 출발하도록 달리고 있는 너를 보고 있어 아직은 결승점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도 너란다”(서윤후, ‘어제오늘 유망주’ 부분) 시의 첫 구절을 읽고, 트랙 안에서 애쓰는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늦게”라는 속도에 관한 표현과 “가까이에”라는 거리를 나타내는 표현 덕에, 트랙에는 그이 말고도 ‘빨리 출발한 누군가’와 ‘결승점에서 먼 누군가’도 있으리라 짐작된다. 그이는 왜 “최대한 늦게” 출발하려는 걸까? 그런데도 어떻게 “결승” 가까이에 있나? 어쩌면 이 시는 다른 이와 속도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과 애써 거리를 두려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그러한 태도로 인해 정해져 있지 않은 결승점에 다다를 수 있는 모습을 그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이라면 내 주변에도 있다. 동생이 초등학생이던 시절, 운동회 날의 일이다. 달리기 경주를 위해 동생 역시 트랙 내부에 섰다. 그런데 신호가 울리고 모두가 앞으로 뛰어가던 순간, 한 아이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어른들이 넘어진 아이가 느낄 통증을 아이의 몫으로만 여기던 찰나, 문득 동생이 결승점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넘어진 친구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게 아닌가. 결국 두 사람은 남은 트랙을 함께 완주할 수 있었다. ‘넘어진 친구를 봤는데 어찌 계속 달리느냐’던 동생의 답변과 그만의 다른 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 완성한 낙오자 없는 경주를, 나는 잊지 못한다.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결승점을 통과한 사람의 속이라 해서 의연하기만 할까. 아닐 것이다. 지금 사회는 트랙 내의 규칙을 따라야만 ‘루저’가 되지 않는다고, 그것만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일러주기 때문에 다른 태도로 트랙에 접근하는 이는 적지 않은 긴장을 견뎌야 한다. 서윤후의 시도 정해진 “궤도”를 따르는 경직된 상황이 야기하는 팽팽한 긴장을 전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를 꿋꿋이 관통하기 위해 나름의 방안을 택한다.
“가방 속에 꺼낼 어둠의 다발이 많아 이름 앞에 놓인 모든 형용사들이 징그러운 책을 펼치면 기울어지는 흰 종이 검은 글자 사이의 멀미, 빗나간 밑줄들// 어디에 멈춰서 운동화 끈을 묶을 것인가/ 돌파구는 무엇인가/ 애쓰는 발꿈치로 밀고 나가는 트랙에서”(같은 시, 부분)
정해진 곳에 밑줄을 그으라는 강요를 따르지 않고 다른 곳에 “빗나간 밑줄”을 그으며 의외의 의미를 길어 올리는 독서에 시인은 매혹되어 있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렇게 살면 나름의 “궤도”를 갖추며 새로운 관계, 새로운 세상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동생이 행했던 대로 지금 우리에겐, 누군가 다치는 상황에서 일등을 차지하는 일이 덧없음을 깨닫고 넘어진 사람이 일어설 수 있도록, 나 역시 넘어진다 해도 기꺼이 일어날 수 있도록 서로 용기를 나누는 태도가 필요하다.
시에서 혹은 삶에서 운동화 끈을 묶는 자리는 어디인가. 모두의 발목이 안전하도록 모래가 고르게 펴진 바닥, 모두가 각자의 스타일로 살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애쓰는 발꿈치”와 같은 디딤대가 되어주는 곳, ‘더뎌도 함께 가는’ 방식으로 마련된 자리. 그런 자리를 일구는 순간이야말로 답답한 지금 사회의 “돌파구”가 마련되는 때가 아닐까. 정해진 방식으로만 달릴 때, 지금과는 다른 삶은 만날 수 없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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