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 걸기
‘어차피’라는 말이 곳곳에서 자주 들린다. 예사롭게 넘기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는 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누구와 결혼하는지 갑론을박하는 과정에서,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선 한 참가자가 대형기획사 가수의 우승을 랩으로 점치면서 언급됐다. 처음 ‘어차피’는 우스개일지언정 예상 결론에서 빠져나가 오히려 그 결말로 진행될 이야기를 상대화하고, 기왕의 결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꾸리는 방편으로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언급한 두 경우를 포함하여 최근의 ‘어차피’는, 말을 꺼낸 이가 아무리 자기 뜻을 피력하더라도 절대 예상 결론에서 비켜날 수 없는 상황의 환기와 함께 활용되는 듯하다. ‘발버둥 쳐봐야 어차피 결과는 안 좋아’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어’…. 이쯤이면 ‘어차피’는 새 결론을 창조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는 부사(副詞)이자, 전망을 그리기가 쉽지 않은 처지의 자조가 깃든 말이라 할 만하다. 쉽게 바뀌지 않는 현재 한국 사회의 구조가 다른 미래에 대한 상상을 중단시키고, 정해진 결론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무력감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내뱉을수록 더욱 실체로 느껴지는 게 또한 말의 효과이기도 해서, 우리가 실제로 ‘어차피’란 말을 발음할수록 미래가 소거될 뿐 아니라 미래를 만드는 현재의 몸짓 역시 더불어 헛헛해진다는 데 있다. 어차피 이후가 모두 정해져 있다면 ‘될 대로 되라’ 식으로 현재를 버려둬도 그만이지 않은가.
‘어차피’는 말의 성분으로 따지면 ‘부사’에 해당한다. 부사는 완결된 문장에서 빠져도 문장 전체의 의미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다. 하지만 추가적인 성분일 뿐임에도 부사는 문장 전체의 기분에 관여한다. 삭제되어도 상관없을 ‘부사’의 자리에서 말하는 이의 진심이 드러난다. 마치 말하는 이의 정해진 결론에 대한 앙심이 ‘어차피’라는 말에 숨어들어 있듯이.
“삶은 부사(副詞)와 같다고/ 언제나 낫에 묻은 봄풀의 부드러운 향기/ 언제나 어느 나라 왕자의 온화한 나무조각상에 남는 칼자국/ 언제나 피, 땀, 죽음/ 그 뒤에, 언제나 노래가/ 태양이 몽롱해질 정도로/ 언제나/ 너의 빛”(진은영, ‘언제나’ 전문)
시인은 우리의 삶도 ‘부사’와 닮았다고 한다. 날카로운 낫날에 몰래 묻은 봄풀의 향기가 낫의 노동을 대변하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조각상에 티 나지 않는 칼자국이 권력의 잔인함을 암시하듯 삶이란, 삶의 구석진 자리로 물러난 피와 땀, 죽음이 기어코 노래로 엮이는 것. 게다가 거듭 등장하는 부사 ‘언제나’는, 우리의 삶이 생각보다 길게 지속된다는 점마저 상기시킨다. 그러니 ‘어차피’라고 말하면서 다급하게 우리 앞의 결론을 고정할 필요는 없다. ‘언제나’의 시간이 내내 우리 뒤를 따른다. ‘결정된 미래’는 우리를 눈멀게 하지만, 우리 주변을 꾸려나가는 ‘묵묵한 매일매일의 몸짓’은 지금의 삶에서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힘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위의 시는 정해진 결론보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지금의 빛을 먼저 상상해보라 권한다. 삶은 긴 시간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바뀌지 않는 결론은 없다고 속삭이면서.
양경언 문학평론가
※심보선 시인의 ‘시기 어린 수기’에 이어 문학평론가 양경언의 시 칼럼 ‘시동걸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시와 함께 움직이고 시로 해서 들썩인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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