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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귀여운 돼지-맛있는 고기 사이 어디쯤

등록 2013-10-04 16:29수정 2013-10-04 16:29

[만화가게 아가씨] 아라카와 히로무 <은수저> (하)
농촌 현실과 사회의 비현실 간극
깡시골 아이들과 도시 아이 상생 

주인공 하치켄의 급우들은 갓 태어난 새끼 돼지를 보며 “너무 귀여워! 맛있겠다”고 내적 갈등 없이 말할 수 있는 뼛속까지 농가의 자식들이다. 하지만 “귀엽다”와 “맛있다” 사이의 간극은 하치켄으로선 영영 풀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화두다. 새끼 돼지는 귀엽고 돼지고기는 맛있다. 갓 지은 쌀밥에 돼지고기를 수북이 얹어 먹는 돼지덮밥의 맛을 하치켄은 포기할 수 없다.

‘경제동물’을 다루는 거대한 산업 구조를 본 이상, 혼자만 그 맛을 포기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농가를 섣불리 비난할 수도 없다. 대부분 영세 개인 농가를 꾸려가는 급우들의 가족이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방학이고 연휴고 없이 365일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급우의 대학 등록금조차 대지 못하는 현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실은 다른 꿈이 있는 급우들도 영세한 농가를 이어 받고 또 살려내야 한다는 압박에 농업이 아닌 다른 ‘장래희망’ 따위는 입 밖에 내지도 못한다.

그렇게 예뻐하던 돼지의 시체인데도… 

산업이며 국가정책이며 개별 농가의 사정에 도시인과 농업인의 문화적 차이까지 겹친, 척 봐도 하치켄 혼자선 어찌할 수 없는 일이건만 성실하고 배려 깊은 소년인 그는 이 문제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축사의 새끼 돼지에 ‘돼지 덮밥’이라는 이름을 붙여 돌보다가 몇 달 뒤 도축돼 약 50kg의 ‘돼지고기’가 된 그것을 방학 내내 농장에서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사들여 전부 자기 손으로 베이컨으로 만든다. 친구들과 함께 구워먹은 이 ‘수제 베이컨’은 그렇게 예뻐하던 돼지의 ‘시체’인데도 너무나 맛있었다.

이 일견 자학적인 고행을 통해 하치켄은 적어도 자기 안의 모순은 극복할 수 있었을까? 답은 ‘아직은’이다. 그는 새로 태어난 새끼 돼지들에 또 ‘돼지덮밥’ ‘돈까스’ 따위의 이름을 붙이고 귀여워한다. 구조를 바꾸지는 못해도 그 안에서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행할 수는 있다. 아마 그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이 고행은 계속될 것이다.

고민하는 건 하치켄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농업이 밥벌이가 되는 산업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그 구성원들이 당연하게 여겨야만 했던 ‘경제동물의 도축’에 대해 하치켄의 급우들도 조금쯤은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치켄이라는 ‘이물질’이 아이들로 하여금 이를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이 섞이며 빚어내는 고민과 그것을 통한 성장을, 교사들은 흐뭇하게 지켜본다.

“농가의 현실은 사회의 비현실”(<백성귀족>)을 설명하느라 오래도록 심각한 설명을 했지만 이 만화의 절반은 개그다. 비정한 농촌의 법칙과 그것이 ‘현실’이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는 식의, 대안이 없으면 말을 꺼내지도 말라는 식의 일본만화 특유의, 그리고 작가 특유의 강요가 기저에 깔려 있기는 하지만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몇 컷, 몇 개의 인상적인 대사들뿐이다.

 

직접 기른 채소와 고기로 감동적인 피자파티 

오히려 ‘현실’은 대부분 코믹하게 그려진다. 소 직장 검사 실습 대표에 뽑혀 어깨까지 오는 긴 장갑을 끼고 소 항문(실은 실습 기계. 다음에는 실물로 실습하게 해준다고 한다)에 팔뚝까지 밀어 넣으며 ‘눈알을 상실한’ 하치켄, 승마부에서 늘 (못생긴) 말에게 속내를 읽혀 발을 밟히고 치이는 하치켄, 젖소를 사랑하는 ‘홀스타인부’ 선배들에게 납치(?)돼 강제로 젖소 몸매에 찬양을 들으며 거듭 멘붕 상태에 처하는 하치켄의 모습이 그렇다.

게다가 농고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대자연의 품에서 자란 순하고 팔팔한 친구들이다. 어디 하나 꼬인 구석 없고 장차 하고 싶은 일도 뚜렷한 아이들은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격하게 노동하고 갓 수확한 생산물을 맛있게 먹고 (관심분야만) 확실하게 공부한다. 기숙사제 학교임에도 일본 학원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학생들 간의 괴롭힘이나 소소한 심리적 갈등은 거의 없다.

그리고 농고 아이들, 농가 사람들, 정말 맛있게 먹는다. “갓 수확한 채소, 무살균 우유를 먹을 수 있는 게 현장의 특권이지”하면서 말이다. 이 갓 수확한 채소와 직접 가공한 고기와 밀가루 등을 이용해 21세기 일본에서 피자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깡시골 아이들에게 ‘도시 아이’ 하치켄이 주최한 ‘피자 파티’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하고 싶은 게 아무 것도 없던 하치켄이 조금씩 스스로 무언가를 해 나가는 첫 계기가 된 파티였던 것도 물론 감동적이었지만 사실 피자가 너무 맛있어 보여서 더 감동을 받았다. (결국 다음 날 주문해 먹었다) 풀리지 않는 고민과 녹록치 않은 현실 앞에서 말똥냄새, 소똥냄새 맡으며 재미나게 일하고 맛있게 먹는 아이들의 건강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 그게 <은수저>다.

김효진기자 july@hani.co.kr

 

 ▶김효진 기자의 만화가게 아가씨 http://plug.hani.co.kr/toon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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