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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성이 남성처럼 일하면 여성도 싫어한다?

등록 2013-09-04 17:04수정 2013-09-05 11:07

[만화가게 아가씨] <3> 안노 모요코 <워킹맨>
여성이나 여기자가 아닌 그냥 기자로 ‘일 중독’
능력 있고 야심 있다고 남친에게도 이별 통보
취직하기 전엔 ‘직장인 만화’를 꽤 재밌게 읽었더랬다. 장르 만화가 발달한 일본 만화 특성상 피해가기 어렵기도 하고, 어른의 세계를 엿보고 싶다는 희망에 더해 나도 ‘제대로 된 어른’이 되려면 직업 세계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마저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에 남은 직장인 만화, 혹은 직업 만화는 안노 모요코의 <워킹맨>이다. 자신의 일을 너무 사랑하는 주간지 여기자를 그린 이야기. 작품 제목 ‘워킹맨’은 ‘워킹우먼’의 대척 지점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남친 집을 여관 정도로 취급하다가 이별 통보 당해

주인공 주변에는 남성 위주의 취재 환경에서 남성들에 둘러싸여 일하며 ‘여성성’을 발휘해 변칙적으로나마 피로감을 덜며 일하는 ‘워킹 우먼’들이 있다. 자신을 ‘기자’가 아니라 ‘여성’ 혹은 ‘여기자’로 보는 시각에 부딪혀 싸워 이기려 하기 보단 그들의 시각을 수용하며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다. 문학 담당 미모의 여기자는 작가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고 스포츠 담당 여기자는 ‘특유의 섬세함’으로 선수들을 알뜰살뜰 챙겨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간다. 하지만 그녀들의 성취는 변칙적이기에 회사에서 데스크가 되는 ‘정도’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녀들도 그것을 알기에 ‘야심’을 품지 않고 칼퇴근, 결혼 퇴사 등으로 대응한다.

주인공 히로코는 여성이지만 ‘여성으로서’ 일하지 않는 자신을 ‘워킹맨’이라 칭한다. 전형적인 일중독자인 그녀는 사내외의 남성 기자들과 부딪히며 사건 현장을 뛰어다닌다. 물론 데스크가 되고 싶은 야심도 있다. 남성 기자들이 성차별적인 턱없는 트집을 잡을 때 빼고 히로코는 그들과 오직 일을 두고 경쟁하고 협력하는 대등한 동료 사이로 그려진다. 그러나 ‘여성성’을 받아들이며 일하는 여기자 동료들과의 관계는 미묘하다. 일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그녀들과 히로코는 경쟁할 수도 협력할 수도 없다. 물론 서로 공감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은 히로코가 그녀들을 계속해서 의식하게 만든다. 그녀들의 ‘여성적인’ 방식과 구별짓기 위해 히로코는 더욱 더 자신에게 엄격해진다.

‘여성’이라는 조건은 꼭 일에서뿐만 아니라 그녀의 삶 자체를 짓누른다. 능력 있고 일 열심히 하고 야심도 있는 남성은 흠 잡힐 데가 없기 마련이지만 여성이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히로코도 일에 빠져 살며 남자친구 집을 ‘여관’ 정도로 취급하다가 냅다 차인다. 남자친구 신지는 “어째서 늘 그렇게까지 일하는 거야. 너를 보고 있으면 그러지 못하는 내가 무능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어”라고 ‘열폭’하며 헤어지자고 말한다.

직장인에 직장만화 권하기, 몰라도 너무 몰랐다

몇 년 전, 그러니까 아직 내가 학생일 시절, 직장인들에게 <워킹맨> 읽기를 권유한 적이 있는데 대번에 거절당했다. 중고등학생들이 학원물을 읽듯이 직장인들은 직장인 만화를 즐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일본에서 애니메이션화 돼 어느 정도 대중성을 확보했고 그 자체로도 잘 만들어진 ‘직장인 만화’라고 열심히 설명했지만 ‘왜 퇴근 뒤에도 직장 관련 서적을 읽어야 하냐’며 책을 펼쳐보지도 않고 퇴짜를 놨다. 동종업계를 다룬 만화를 기피하는 기자 친구의 반응이 제일 이해 안 갔더랬다.

지금 나는? 기자가 된 이후로 ‘본격 직장인 만화’는 절대 안 본다. 빠칭코 회사 사원 이야기를 그린 네무 요코의 <오전 3시의 무법지대>는 1권 읽은 뒤 영원히 안녕이다. 동종업계를 이야기인 <워킹맨>은 그 뒤로 한 번 꺼내보지도 않았다. 직장 안 인간관계, 승진이나 경영권을 두고 벌이는 권력다툼 같은 소재가 널리고 널렸는데도 <워킹맨>은 기자 업무 한 길만 다루기 때문에 더더욱. 참고로 사건기자 이야기를 비교적 실감나게 묘사했다는 영화 <모비딕>도 진저리를 치며 안 봤다. 방송 기자의 세계를 박진감 넘치게 그렸던 드라마 <스포트라이트>에 푹 빠졌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캡’인 지진희와 신참 손예진의 러브라인을 응원했었다니,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뭘 몰랐구나!

김효진기자 ju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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