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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2500년 서양사에서 실존-신화 속 ‘여성주체’들 불러모아
여성들의 고통 대변하고 옹호했던 원형적 여성의식 발굴
여성들의 고통 대변하고 옹호했던 원형적 여성의식 발굴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한정숙 지음/길·3만8000원 “학식 있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그토록 수많은 남자들이, 기나긴 명단으로 이어질 그 많은 철학자ㆍ시인ㆍ도덕론자들이 어찌하여 그 많은 논문과 저작들에서 여성을 사악한 존재로 여기고 여성의 행동을 비난하는가?”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 사람은 크리스틴 드 피장(1364~1430)이라는 여성이었다. 서양 중세 말기를 살았던 피장은 프랑스에서 (어쩌면 세계에서) 최초로 책을 써서 생계를 꾸린 여성 직업 문필가였다. 시민계급 출신인 피장은 재산도 없이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뒤 재혼하지 않고 글로써 생활을 이어가기로 결심하였고 이를 실천했다. 글을 아는 여성의 존재가 드물었던 그 시대에 직업 문필가로 살겠다는 피장의 결심과 실천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피장은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서양사학자 한정숙 서울대 교수가 쓴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서양 고전과 역사 속의 여성 주체들>은 피장이 여성이라는 뚜렷한 자의식을 품고서 글을 쓰고 말을 함으로써 ‘여성적 대항담론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피장의 사례는 200자 원고지 3200장에 이르는 이 두툼한 저작의 일부를 이룬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불러 세우는 ‘여성 주체들’은 기원전 7세기 레스보스 섬의 시인 사포에서부터 18세기 러시아 학술 권력자 예카테리나 다시코바까지 2500년 서양 역사를 통틀어 강렬한 개성과 행동으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남긴 여성들이다. 이 등장인물 중에는 역사 속 실존 인물도 있지만, 고전 작품 속 여주인공들도 있다. 지은이는 실존 여성들은 역사학 연구 방법으로 그들의 삶과 사상을 충실히 재현하고, 작품 속 인물들은 텍스트를 꼼꼼히 분석함으로써 그들의 존재 의미를 캐묻는다. 이들을 탐구하는 것은 근대 여성주의 탄생 이전의 ‘원형적 여성의식’을 발굴하는 일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우리 시대 페미니즘 운동을 예견하고 예비했던 역사적 기원과 흐름을 추적하는 것이 이 연구서인 셈이다.
그 흐름의 한 뚜렷한 변환점을 이루는 여성이 바로 피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피장은 최초의 여성 직업 문필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 남성들의 거대한 편견에 맞서 글로써 투쟁을 벌인 강인한 지식 전사였다. 사랑했던 남편을 잃은 스물다섯 살의 피장은 학문에서 위안을 받으며 ‘자기 학습’을 통해 지식을 쌓았다. 그가 서구 중세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여성이 된 것은 단순히 학문을 익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식과 담론 자체의 생산자”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여성적 관점’을 감추지 않고 피력했던 피장에게 대중적 논객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것은 <장미 이야기>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장 드 묑이 쓴 <장미 이야기>는 전 세기에 출간돼 중세 남성과 여성들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문학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여성을 탐욕스럽고 사악하고 음탕한 존재로 그렸다. “장 드 묑이 보기에 여성은 남성의 성욕 충족의 대상일 뿐이다.” 여성 혐오적이고 여성 비하적인 내용으로 일관한 이 작품을 피장은 편지 형식의 문학 작품으로 격렬하게 비판했다. 여성의 명예를 더럽히는 그 책을 불태워버려야 한다고도 했다. “여자들을 비방하고 헐뜯고 속이는 불성실한 남자들 때문에 그들(여자들)이 날마다 겪는 심한 착취, 비난, 중상, 배반,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분노들, 사기, 다른 수많은 괴로움들”을 모든 여성들을 대신해 토로했다.
피장은 여성 일반을 향한 이런 부당한 공격에 반격하려고 따로 작품을 쓰기도 했다. <숙녀들의 도시>가 바로 그 반격을 작품화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피장은 여성의 잠재적 능력을 옹호했다. “자연은 분명히 가장 현명하고 학식이 많은 남자들에게 준 것과 똑같은 몸과 정신의 자질을 여자들에게도 주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미개해 보이는 것은 이들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 구절에 이어 “피장이야말로 시몬 드 보부아르보다 몇 세기 앞서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라고 설명한다. <숙녀들의 도시>는 ‘여성들의 이상향’을 그린 작품이었다. 이 여성 유토피아에 피장은 수많은 신화적ㆍ역사적 여성들을 불러들여 찬양했는데, 그 가운데는 ‘현명한 사포’와 ‘콜키스의 왕녀 메데이아’도 있었다. 특히 피장은 메데이아를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로 평가하는데, ‘악녀의 대명사’로 여겨져 온 메데이아의 의미를 완전히 전복시킨 이런 평가는 말 그대로 담대한 도전이다.
지은이는 피장이 위대한 여성으로 끌어올린 이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 메데이아를, 다른 악명 높은 신화적 인물들과 함께 이 책의 1부에서 분석한다. 메데이아는 남편을 죽인 클리타임네스트라보다 더 끔찍한 살인을 한 ‘악녀 중의 악녀’로 기록된 인물이다. 영웅 이아손을 사랑해, 모든 것을 다 바쳐 그의 동반자가 됐던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자신을 팽개치고 코린토스의 왕녀에게 가버리자, 비참과 절망의 밑바닥에서 두 자식을 죽여 버린다. 남자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없애버림으로써 사적 복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 속에서 이 여주인공은 개인적 복수심에 불타는 존재를 넘어 여성 일반의 고통을 대변하는 존재다. “생명과 분별력을 가진 모든 것들 가운데 우리 여자들이 가장 비참한 존재입니다.”
그런가 하면 남편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를 상징하는 사람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살인은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 나가려고 큰딸을 죽여 희생물로 바친 데 대한 복수였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모성의 권리가 부정당하는 데 대해 잔인한 방법으로 항거한 셈인데, 비극 작가는 이 여성의 복수를 용인하지 않고 자녀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남성의 것으로 돌려준다. “어머니는 자식이라고 부르는 자의 생산자가 아니라, 새로 씨 뿌려진 태아의 양육자에 불과하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가부장제가 최종적으로 확립되던 시기의 어머니, 몰락해가는 어머니, 패배하는 어머니”를 보여준다고 이 책은 해석한다. 그 모성의 권리, 여성의 권리가 회복되는 데는 200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19세기 이후 끈질긴 여성해방 운동을 거친 뒤에야 여성은 가부장제의 숨막히는 봉쇄를 뚫고 겨우 주체로서 인간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한정숙 지음/길·3만8000원 “학식 있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그토록 수많은 남자들이, 기나긴 명단으로 이어질 그 많은 철학자ㆍ시인ㆍ도덕론자들이 어찌하여 그 많은 논문과 저작들에서 여성을 사악한 존재로 여기고 여성의 행동을 비난하는가?”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 사람은 크리스틴 드 피장(1364~1430)이라는 여성이었다. 서양 중세 말기를 살았던 피장은 프랑스에서 (어쩌면 세계에서) 최초로 책을 써서 생계를 꾸린 여성 직업 문필가였다. 시민계급 출신인 피장은 재산도 없이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뒤 재혼하지 않고 글로써 생활을 이어가기로 결심하였고 이를 실천했다. 글을 아는 여성의 존재가 드물었던 그 시대에 직업 문필가로 살겠다는 피장의 결심과 실천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피장은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서양사학자 한정숙 서울대 교수가 쓴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서양 고전과 역사 속의 여성 주체들>은 피장이 여성이라는 뚜렷한 자의식을 품고서 글을 쓰고 말을 함으로써 ‘여성적 대항담론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피장의 사례는 200자 원고지 3200장에 이르는 이 두툼한 저작의 일부를 이룬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불러 세우는 ‘여성 주체들’은 기원전 7세기 레스보스 섬의 시인 사포에서부터 18세기 러시아 학술 권력자 예카테리나 다시코바까지 2500년 서양 역사를 통틀어 강렬한 개성과 행동으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남긴 여성들이다. 이 등장인물 중에는 역사 속 실존 인물도 있지만, 고전 작품 속 여주인공들도 있다. 지은이는 실존 여성들은 역사학 연구 방법으로 그들의 삶과 사상을 충실히 재현하고, 작품 속 인물들은 텍스트를 꼼꼼히 분석함으로써 그들의 존재 의미를 캐묻는다. 이들을 탐구하는 것은 근대 여성주의 탄생 이전의 ‘원형적 여성의식’을 발굴하는 일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우리 시대 페미니즘 운동을 예견하고 예비했던 역사적 기원과 흐름을 추적하는 것이 이 연구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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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위해 발언한 최초의 여성 직업 문필가 크리스틴 드 피장.
피장은 여성 일반을 향한 이런 부당한 공격에 반격하려고 따로 작품을 쓰기도 했다. <숙녀들의 도시>가 바로 그 반격을 작품화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피장은 여성의 잠재적 능력을 옹호했다. “자연은 분명히 가장 현명하고 학식이 많은 남자들에게 준 것과 똑같은 몸과 정신의 자질을 여자들에게도 주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미개해 보이는 것은 이들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 구절에 이어 “피장이야말로 시몬 드 보부아르보다 몇 세기 앞서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라고 설명한다. <숙녀들의 도시>는 ‘여성들의 이상향’을 그린 작품이었다. 이 여성 유토피아에 피장은 수많은 신화적ㆍ역사적 여성들을 불러들여 찬양했는데, 그 가운데는 ‘현명한 사포’와 ‘콜키스의 왕녀 메데이아’도 있었다. 특히 피장은 메데이아를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로 평가하는데, ‘악녀의 대명사’로 여겨져 온 메데이아의 의미를 완전히 전복시킨 이런 평가는 말 그대로 담대한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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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메데이아〉(1838). 그리스 신화 속의 메데이아는 남편 아이손의 배신에 격분해 두 자식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복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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