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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한국 지식사회여, 베버한테 배워라

등록 2008-02-01 21:37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김덕영 지음/인물과사상사·1만3000원

학제간 장벽없는 독일 대학제도 수혜입고
학문으로 제국주의 비판한 지식인 통해
국내 대학과 학문 현실 꼬집고 역할 제시

막스 베버(1864~1920)는 페르디난트 퇴니스, 게오르크 지멜과 더불어 현대 독일 사회학의 창시자로 꼽힌다. 그러나 그가 끼친 영향의 범위는 사회학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현대 사회과학 전반의 토대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는 ‘전문성’을 학문의 본령으로 내세운 최초의 학자였지만, 그 전문성으로 이룬 업적은 보편성을 성취했다. 사회과학 전반에 끼친 광대한 영향으로 가늠해 볼 때 베버와 어깨를 견줄 사람은 앞세대의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뿐이다. 베버는 자기와 사상적 대척점에 있었던 마르크스를 ‘거인’으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마르크스를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각인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다. 마르크스가 그때까지 살았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베버 전공자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가 쓴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는 현대 사회과학의 지평을 열어젖힌 이 학문의 개척자를 소개하는 전기적 저작이다. 이 책에서 특히 지은이가 주목하는 것은 학자로서, 지식인으로서 베버의 삶이다. 베버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학과 학문이 어떤 구실을 해야 하는지, 학자 또는 지식인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준거를 찾을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리고 그 준거로써 한국의 대학 현실과 학문 현실을 비판하는 데 지은이의 근본 관심이 있음을 이 책은 알려준다.

지은이가 먼저 강조하는 것이 ‘서열 없는 독일 대학 제도의 수혜자’ 베버다. 베버는 1882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입학한 뒤 슈트라스부르크대학, 베를린대학, 괴팅겐대학을 두루 돌며 명망 높은 학자들 밑에서 공부했다. “이처럼 대학을 옮겨다닐 수 있는 것이 독일 대학의 커다란 장점이다. 독일의 대학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대학들 사이의 서열이 아니라 어떤 대학에서 어떤 학설이나 이론이 주창되고 어떤 연구와 강의가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그 세계에는 서열이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베버가 이렇게 여러 대학을 돌면서 ‘학문의 장벽을 뛰어넘는 연구’를 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베버’ 하면 ‘사회학’과 즉각 동일시되지만, 그의 학문적 출발점은 법학이었다. 그가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것은 인생 말년의 일이다. 그는 박사학위도 법학으로 받았고, 교수자격(하빌리타치온)도 법학으로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학부 시절부터 법학 외에 경제학·철학·신학·역사학·고전학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1892년 28살의 젊은 베버는 베를린대 사강사가 되고 1년 뒤에는 같은 대학 부교수로서 로마법과 독일법을 가르쳤다.



(위부터) 맹렬한 독서광이었던 14살 때의 막스 베버. 1893년 결혼 직후의 베버와 ‘평생의 반려자’ 마리아네. 1917년 학술모임의 베버. 베버는 이 학술모임에서 당시 뮌헨대학 학생이었던 에른스트 톨러(왼쪽에서 두 번째)를 알게 됐다. 베버는 톨러가 1919년 뮌헨 소비에트 혁명 주도자로 체포되자, 사상이 달랐는데도 법정에서 그를 적극 변호했다.
(위부터) 맹렬한 독서광이었던 14살 때의 막스 베버. 1893년 결혼 직후의 베버와 ‘평생의 반려자’ 마리아네. 1917년 학술모임의 베버. 베버는 이 학술모임에서 당시 뮌헨대학 학생이었던 에른스트 톨러(왼쪽에서 두 번째)를 알게 됐다. 베버는 톨러가 1919년 뮌헨 소비에트 혁명 주도자로 체포되자, 사상이 달랐는데도 법정에서 그를 적극 변호했다.
1894년 베버는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정교수로 취임했는데, 30살에 정교수가 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경제학과 재정학 전공 교수로 초빙됐다는 사실이다. 그는 법학을 연구하는 중에 경제학 분야의 뛰어난 논문을 썼는데, 이것이 학계의 공인을 받았던 것이다. 정교수가 된 지 3년 만에 그는 다시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경제학·재정학 정교수로 발탁됐다. 이 사실이 또한 당대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베버가 이어받은 자리는 당시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대표자였던 카를 크니스의 후임이었던 것이다. 이런 도약은 우선은 베버 자신의 집요한 공부와 노력의 소산이었지만, ‘학제간 연구’라는 제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런 성취도 없었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식인으로서 막스 베버는 학제간 교육을 통해 탄생했다.” 학문 사이 장벽이 철옹성처럼 둘러친 한국 대학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베버의 입신출세는 독일 대학 제도를 발판으로 삼은 것이었지만, 그의 진정한 학문적 성취는 당대 독일 정신과의 끈질긴 투쟁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이 책은 말한다. 베버가 산 시대는 독일이 뒤늦게 통일을 이룩하고 산업혁명을 완수한 뒤 제국주의 쟁탈전에 뛰어든 시기였다.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로 대표되는 ‘제2제국’(1871~1918) 시대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독일은 군주주의·권위주의·국가주의·관료주의가 맹위를 떨쳤다. 미성숙한 독일 시민(부르주아)계층은 귀족계급의 지배 아래 얌전한 아들처럼 몸을 수그렸다. 대학도 지식인도 독일 제국의 지배체제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있었다.

베버가 보기에 독일 시민계층의 이런 정치적 미성숙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시민의 미성숙은 “독일 역사의 종말을 고할지도 모를 정도로 위협적인 것”이라는 게 베버의 확신이었다. 1918년에 쓴 ‘새로운 질서의 독일에서의 의회와 정부’라는 글에서 베버는 ‘비스마르크의 유산’을 통렬하게 꼬집었다. 비스마르크는 “눈곱만큼의 정치적 교육도 받지 못한 국민”을 유산으로 남겼으며, “눈곱만큼의 정치적 의지도 없는 국민”을 유산으로 남겼고, “군주주의적 정부라는 미명 아래에서 숙명적으로 지배를 받도록 길들여진 국민”을 유산으로 남겼다.

이 유산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베버가 저항의 무기로 선택한 것이 ‘학문을 통한 비판’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말하자면 ‘비판’은 학자의 ‘직업윤리’였다. 그때 베버가 비판의 거점으로 삼은 것이 ‘방법론적 개인주의’였다. 독일에 지금 필요한 것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라고 믿었던 그는 그것을 실천할 학문적 방법으로 ‘개인주의’를 선택했다. 그 개인주의로 그는 먼저 자신의 학문적 아버지라 할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을 공격했다.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은 국가를 행위의 주체로 간주하고 있었다. 요컨대 역사학파 경제학은 학문에 똬리를 튼 국가주의였다. 그는 국가 대신에 개인을 내세웠다. 그것은 국가라는 신성한 개념을 ‘탈주술화’하는 작업이었다. “막스 베버의 사회학은 집단주의적·국가주의적 사고의 ‘주술’에 걸려 있던 사회과학을 ‘탈주술화’한 논리의 혁명이었다.”

이 비판과 혁명을 통해 베버는 대학을 ‘정신의 공화국’으로 만들려 했다. 대학은 정신적 자유의 마당이어야 했다. 다양한 자유로운 정신들이 모여 서로 투쟁하는 곳이 대학이었다. 그 시절 독일 대학에선 유대인이나 사회주의자는 교수로 임용되기 어려웠다. 베버는 독일 학계의 반유대주의와 반사회주의에 대항해 싸웠다. ‘공화국’엔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베버의 싸움은 과거에 사로잡힌 독일에 진정한 ‘근대성’을 들여오는 작업이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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