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적 탄핵이 초래한 아버지 죽음이 명저 ‘프로테스탄티즘…’ 낳아
학자로서 승승장구하던 막스 베버는 30대 중반에 커다란 실존적 위기에 맞닥뜨렸다. 1898년부터 4년 동안 그는 아무것도 쓰지도 읽지도 못했다. 생각하는 것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는 정신적 탈진 상태에 빠져 깊은 우울증을 앓았다. 학자로서 무능력자였던 그 기간 내내 그는 대학을 휴직했고 1903년에는 교수직에서도 물러났다. 베버는 왜 건강을 잃었던 것일까. 김덕영 교수의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는 그 근본 원인을 ‘부자 관계’에서 찾는다.
베버는 유복한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었다. 법률가였던 아버지는 독일제국의 수도 베를린의 행정가로 활동하다 나중에는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만족하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였다.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고 쾌락을 즐기는 세속적 인간이었다. 집안에서 그는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이었다. 반면에 베버의 어머니는 캘빈주의의 덕목이 몸에 밴 신앙인이었다. 경건하고 금욕적이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압제자였다. 그들의 결혼은 진즉에 파탄 나 있었다. 1897년 은퇴한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아들이 막 부임해 살던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한 것이 발단이었다. 베버는 그때 어머니 위에 군림하는 아버지라는 ‘폭군’을 다시 목격했다. 그때의 상황을 베버의 아내 마리아네 베버는 이렇게 썼다.
“이때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불협화음이 마침내 폭발했다. 아들은 쌓인 분노를 더는 억제할 수 없었다. 용암이 분출했다. 섬뜩한 일이 일어났다. 아들이 아버지를 재판한 것이다. 여자들 면전에서 담판이 벌어졌다.” 아들에게 탄핵당한 아버지는 그날로 하이델베르크를 떠났고, 7주 후에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아들은 발병했다. 김덕영 교수는 그 사건을 ‘아버지 살해’라고 규정한다.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죽인 아들은 무의식중에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 결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울증에 걸렸던 것이다.
베버의 우울증은 1902년을 기점으로 하여 서서히 나아졌다. 1903년 베버는 연구 작업을 재개했는데, 그때 쓰기 시작한 것이 저 유명한 저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김덕영 교수의 책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베버의 그 저작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아버지 살해’의 학문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떠들썩하게 즐긴 쾌락주의적 세속주의가 부르주아의 진정한 정신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말없이 보여준 캘빈주의적 금욕주의가 근대 자본주의를 일으킨 정신적 힘이었음을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저작을 집필하면서 베버는 무력증에서 완전히 벗어나 과거의 혈기왕성한 학자로 돌아갔다. 아버지와의 싸움은 베버가 생애 내내 독일제국의 낡은 문화와 벌인 싸움의 가족적 판본이었다.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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