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카이스트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
정재승의 책으로 만난 과학 /
팝이나 대중가요는 한 곡의 길이가 왜 일정하게 3~5분 정도일까? 인지적으로 그 정도가 우리가 집중해서 한 곡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주장에서부터 가수의 체력을 고려한 것이라는 의견까지 다양한 가설들이 있다.
그중 믿을 만한 가설 하나는 처음 레코드판이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 1분에 약 80번 회전하는 에스피(SP·standard play)의 한쪽 면에 녹음 가능한 분량이 3~5분 정도여서, 한 면에 되도록 한 곡만 넣을 수 있도록 음악의 길이를 일정하게 맞췄다는 주장이다. 그 후 1분에 33과 1/3회전을 하는 엘피(LP·Long Play)가 등장하면서 한 면에 30분 이상 녹음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한 곡의 길이는 대체로 3~5분 정도로 하고, 여러 싱글을 사진첩에 사진 모으듯 담은 ‘앨범’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디(CD)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음악의 길이는 좀더 흥미롭게 결정됐다. 1982년 시디를 개발한 필립스와 소니는 시디 한 장에 과연 얼마나 많은 음악을 담는 것이 적당할지에 대해 당시 최고의 지휘자였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게 자문했다. 카라얀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 약 74분 정도 되는데, 이 곡 정도는 시디 한 장에 담겨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후에 시디의 용량은 그의 제안대로 74분으로 정해졌다. 음악 한 곡의 길이가 과학기술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면, 시디 한 장의 용량이라는 과학기술은 음악에 의해 결정된 셈이다.
상업영화 한 편이 왜 대개 100분 정도냐면 영화제작자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보기에 ‘100분이 넘어가면 갑자기 극장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지루해하더라’는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다. 자본이 투입된 미디어일수록, 감상의 호흡은 점점 더 획일화되는 걸까?
엘피와 시디, 그리고 디브이디(DVD)들은 유리장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왜 내 연구실 책장의 책들은 그토록 어지럽게 꽂혀 있는 걸까? 시디와 디브이디 같은 디지털 미디어는 무형의 콘텐츠를 담고 있어 겉모습이 내용물의 길이와 일치할 필요가 없어 늘 가지런히 놓을 수 있지만, 아날로그 미디어인 책은 그 크기와 모양, 두께와 무게가 고스란히 콘텐츠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대개 원고지 1000매 내외가 한 권을 이루고, 가로 14센티미터·세로 21센티미터의 A5국판이 일반적인 소설 크기이긴 하지만, 두께와 크기에서 책은 그 모양이 좀더 다양하다.
얼핏 내 책꽂이에 꽂힌 책만 보더라도 그렇다. 애서가들에 관한 책인 〈젠틀 매드니스〉는 1110쪽이 넘지만, 〈직딩을 위한 낙서책〉은 겨우 48쪽에 불과하다. 최근 읽고 싶어 책상 앞에 쌓아둔 소설 〈배터리〉는 250쪽 분량으로 6권이나 되지만, 윤희상의 시집 〈소를 웃긴 꽃〉은 100쪽이 겨우 넘는다. 어린이책들은 국배판이나 4·6배판처럼 큰 것이 대부분이지만, 시집은 A6처럼 작고 날렵하며, 잡지는 B5나 크라운판처럼 세련됐다.
책의 매력은 그 외장이 한몫을 하지 않나 싶다. 책의 분위기를 가늠하게 해주는 표지와 지은이의 노력을 느끼게 해주는 두께, 그리고 출판사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종이의 색깔과 재질까지. 오늘도 책장의 책들이 나를 펼쳐 달라고 소리 없이 유혹한다.
정재승 /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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