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김용규 지음
악마와 거래한 파우스트에게선 자아투쟁의 치열함을 시지프스에게는 반항하는 존재의 승리를
데미안에게선 절망과 고통의 강을 건너는 법을 문학작품 13편에서 구하는 삶의 해법
데미안에게선 절망과 고통의 강을 건너는 법을 문학작품 13편에서 구하는 삶의 해법
비블리오테라피. ‘독서치료’를 이르는 말이다. 책을 읽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정신을 일깨우며, 자기신뢰를 회복하고 삶의 전망을 얻는 것, 독서에는 그런 치유의 힘이 있다.
철학자 김용규씨가 쓴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는 카페에서 가벼운 정신상담을 받듯, 문학 작품을 놓고 ‘멘토링’을 듣는 기회를 주는 책이다. 삶이 왜 이렇게 힘든가, 인생에 의미가 있긴 있는가, 허무한 마음을 벗어날 길은 없는가. 이런 의문을 품고 있다면 누구든 이 카페에 들러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지은이는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전작에서 대중예술을 재료로 삼아 철학 요리를 선보인 바 있다.
새 책에서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카프카의 <변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리고 최인훈의 <광장>,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포함해 모두 13편의 문학작품을 실마리로 삼아 철학의 길, 삶의 해법을 찾고 있다.
세계를 알고 자기를 아는 것, 그리하여 세계 안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용기를 얻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지은이가 먼저 내미는 작품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파우스트>다. 독일어로 쓴 최고의 근대문학으로 꼽히는 이 비극은 주인공 파우스트를 근대인의 전형으로 일으켜 세운 기념비적 작품이다.
25살 청년이 81살 노인이 될 때까지 괴테가 전력을 다해 창조한 파우스트는 윤리적 관점에서만 보면 결코 반듯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무한대의 욕망을 지닌 사람이다. 이기적이고 거만하고 자기밖에 모른다. 그는 세계의 모든 비밀을, 모든 진리를 파헤쳐 알려는 ‘진리의지’에 불타는 사람이며, 감각적 즐거움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만끽하려는 ‘쾌락의지’에 몸을 내맡기는 사람이다.
그는 이 욕망 때문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해 젊은 사람으로 재탄생하고, 아름다운 처녀를 탐하는가 하면 살인을 저지르고, 그리스 신화의 미인 헬레나를 찾아 지하세계를 다녀오고,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머쥐어 황제의 하사품으로 드넓은 바닷가 땅을 얻는다. 철학카페에서 독서치료를
이 땅을 간척해 옥토로 바꾸는 꿈에 취한 그는 그 최고의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외치며 죽는다. 악마와 거래하고 살인도 마다지 않는 그는 도덕관념으로 보면 구원받을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도 천사들은 이 ‘영혼을 팔아넘긴 자’를 신의 품으로 끌어올린다. 여기에 이 작품의 비밀이 있다. 그가 구원받는 것은 끝없이 노력하고 분투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기실현을 향한 투쟁에서 한 발짜국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실현하는 일, 오직 이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고 파우스트는 수많은 죄악과 슬픔, 그리고 절망을 견디면서 다시 희망을 품고 폭풍같이 일생을 해쳐온 것이다.” 이 무자비한 열정, 한계 없는 용기야말로 구원의 비밀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 자기탐험과 자기실현을 향한 끝없는 도전의 드라마는 괴테 이후 독일 문학에 ‘성장소설’(교양소설)이라는 장르를 낳았다. 그 성장소설의 20세기적 모델로 평가받는 것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이다.
헤세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13살부터 20살 무렵까지 성장기를 겪는 젊은이의 내적 갈등과 진통을 빼어나게 묘사했다. 에밀의 삶에 ‘멘토’로 등장하는 것이 상급생 데미안이다.
어린 에밀에게 데미안은 “어른처럼 낮설고 성숙하며, 너무나도 우월하고 냉정하고 의지에 가득 찬 완벽한 초인”이다. 에밀은 데미안을 통해 자기투쟁과 자기극복의 비전을 본다.
청년이 된 그가 발견한 삶의 진리는 이 소설의 유명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알을 깨고 나온 새, 미숙에서 성숙으로 진화한 새는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간다. 아브락사스는 악마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통합한 신이다. 이 신은 인간 내면에 거주한다. 그러므로 헤세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선과 악, 정신과 본능, 성스러운 것과 추한 것이 공존하는 내면을 직시하고 그 대립하는 두 세계를 조화시킴으로써 삶을 온전히 사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은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이 하나로 포개져 있다. 자기실현은 절망과 고통의 강을 건너는 일이다. 거센 물살이 두려워 거기서 멈춰서는 강 건너의 세계로 갈 수 없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그러나 자기실현은 세계 안에서 세계와 더불어 이루는 일이다. 세상이 폐허고 허무라면, 자기실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0세기 혼란의 한복판을 살았던 장 폴 사르트르는 소설 <구토>(1938)의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의 입을 통해 “삶이란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텅 빈 껍데기일 뿐이다”라고 외치게 한다.
익명성과 평균성의 도시, 불안과 권태가 스모그처럼 낀 도시는 삶의 사막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사막에서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르트르와 함께 실존주의 문학의 최전선에 섰던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1947)에서 사막 같은 삶에 덮쳐든 무의미라는 역병과 싸우는 인간을 그려냈다.
사람은 사막에서 견디는 법 배워야
카뮈가 시지프스 신화를 빌려 보여주는 인간의 삶은 무의미 자체다. 시지프스는 산 꼭대기로 바위를 굴러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이 무한한 반복의 형벌을 카뮈는 ‘반항’으로 역전시킨다.
자유를 품은 인간의 결단으로 카뮈의 주인공들은 구원도 희망도 없는 사막에서 자살에도 포기에도 호소하지 않고 반항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존재의 승리를 확인한다.
“이리하여 일관성 있는 유일한 철학적 입자은 반항이 된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의 어둠과 벌이는 끝없는 대결이다.” 반항을 삶의 형식으로 삼은 시지프스는 자기 운명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다. 카뮈는 말한다.
“그가 꼭대기를 떠나 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순간 시지프스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그는 이 욕망 때문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해 젊은 사람으로 재탄생하고, 아름다운 처녀를 탐하는가 하면 살인을 저지르고, 그리스 신화의 미인 헬레나를 찾아 지하세계를 다녀오고,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머쥐어 황제의 하사품으로 드넓은 바닷가 땅을 얻는다. 철학카페에서 독서치료를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장 폴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지저분하고 불결한 도시 안에서 방황하는 지식인 로캉탱의 견딜 수 없는 허무감을 묘사했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실존주의 문학의 기수 알베르 카뮈. 카뮈는 <페스트>에서 출구 없는 상태에서 흑사병에 휩싸인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이 죽음의 전염병과 싸우는 사람들을 그려냄으로써 삶의 무의미와 대결하는 ‘반항의 정신’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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