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세계의 만남. 제리 벤틀리 지음. 김병화 옮김. 학고재 펴냄. 1만5000원
개종-절충-저항의 틀로 고대 문화의 만남 설명
불교 전파 오랜 ‘절충’ 거쳐 문화의 ‘충돌’보다 ‘교제’ 주목
불교 전파 오랜 ‘절충’ 거쳐 문화의 ‘충돌’보다 ‘교제’ 주목
고대세계의 문명교류와 융합에 관한 탐구 결과는 문명사학자 정수일씨의 노력으로 비교적 널리 알려졌다. 그의 연구는 특히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 문명의 조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와이대학 역사학 교수인 제리 벤트리가 쓴 <고대세계의 만남>은 문명교류사의 시야를 전세계 차원으로 넓혀 근대 이전의 거의 모든 중요한 문화전파 양상을 살핀 저작이다. 인류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기독교·이슬람교·불교는 물론이고 조로아스터교·마니교와 같은 종교문화의 흐름과 스밈과 섞임을 추적한다.
이 책이 나온 시점은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한창 위력을 떨치던 1993년이다. 그 거친 이론을 염두에 둔 듯 지은이는 문화 간 충돌보다는 ‘만남’과 ‘교제’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이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문화 간 교류의 양상을 공통의 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한 문화권에서 탄생해 발전한 가치체계가 다른 문화권에 스며들어 사회 전체를 바꾸는 과정을 개종-절충-저항이라는 틀로 설명한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절충’ 과정이다.
낯선 관념과 가치가 변형 없이 통째로 다른 문화권에 이식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토착문화의 자장 안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 뿌리내렸다.
그런 만남과 변형과 정착의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이 책에서 설명하는 ‘불교의 중국 전파’다. 불교가 중국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길고 힘들었다.
불교를 매개로 한 두 문화의 만남은 가장 거대한 정신적 변혁을 품은 만남이기도 했다. 언어·심리·도덕·정치 모든 면에서 거의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두 문화가 융합했기에 거기에서 막대한 문화적 자양분이 만들어졌다.
인도가 중국과 만나는 데 결정적 통로 구실을 한 것이 고대 실크로드였다. 중국의 한제국과 유럽의 로마제국 사이 문물 유통의 루트였던 실크로드는 문화적 차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녔다. “실크로드의 진정한 중요성은 상업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데 있었다.”
고대 중요한 종교가 이 길을 따라 맹렬하게 오고 갔기 때문이다. 기원전 5~6세기께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상인들에게 먼저 인기를 끌었다. 지배종교였던 브라만교가 브란만들만의 종교였던 반면에 불교는 신흥계급인 상인들의 구원을 약속했던 것이다. 인도 불교는 상인들의 루트를 타고 실크로드로 번졌고,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출신 중개상들에게 퍼졌다. 기원 후 1세기께면 중앙아시아에서 불교는 자발적 개종자들의 넓은 네트워크를 얻었고, 중국에도 들어간 상태였다. 그러나 그러고도 100~200년 동안 불교는 중국 토착민 개종자를 거의 얻지 못했다. 문화관념이 너무 달라 토착 대중이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5~6세기께 중국 북부에 세워진 유목 왕조인 서조와 북위의 지배 엘리트들이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뒤에서 거점이 마련됐다. 이 지배 엘리트들은 불교에서 자신들의 지배와 권위를 보장해주는 이데올로로기를 얻었고, 그 대가로 불교 승려들에게 대규모 토지를 내주었다. 수·당 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중국 내부로 완전히 진입했다. 새 지배자들이 유목 왕조의 불교 활용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데는 한번 더 중요한 ‘절충’ 과정이 필요했다. 낯선 관념을 친숙한 관념으로 만들기 위해 불교 승려들은 중국 내부의 종교 전통인 도가의 언어에 기댔다. 도가의 관념을 빌려 불교를 통역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본디 불교 관념에 중국적 색채가 짙게 배어들었다. 또 이 과정에서 인도불교 문헌이 고대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옮겨지는 번역사업이 벌어졌다. 이 번역사업으로 불교는 본디 모습을 완전히 잊지 않고 뿌리를 간직할 수 있었다. 불교 관념은 유학자들의 저항에 부딪쳐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13세기 이후 등장한 송·명 신유학의 발흥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고대 중요한 종교가 이 길을 따라 맹렬하게 오고 갔기 때문이다. 기원전 5~6세기께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상인들에게 먼저 인기를 끌었다. 지배종교였던 브라만교가 브란만들만의 종교였던 반면에 불교는 신흥계급인 상인들의 구원을 약속했던 것이다. 인도 불교는 상인들의 루트를 타고 실크로드로 번졌고,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출신 중개상들에게 퍼졌다. 기원 후 1세기께면 중앙아시아에서 불교는 자발적 개종자들의 넓은 네트워크를 얻었고, 중국에도 들어간 상태였다. 그러나 그러고도 100~200년 동안 불교는 중국 토착민 개종자를 거의 얻지 못했다. 문화관념이 너무 달라 토착 대중이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5~6세기께 중국 북부에 세워진 유목 왕조인 서조와 북위의 지배 엘리트들이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뒤에서 거점이 마련됐다. 이 지배 엘리트들은 불교에서 자신들의 지배와 권위를 보장해주는 이데올로로기를 얻었고, 그 대가로 불교 승려들에게 대규모 토지를 내주었다. 수·당 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중국 내부로 완전히 진입했다. 새 지배자들이 유목 왕조의 불교 활용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데는 한번 더 중요한 ‘절충’ 과정이 필요했다. 낯선 관념을 친숙한 관념으로 만들기 위해 불교 승려들은 중국 내부의 종교 전통인 도가의 언어에 기댔다. 도가의 관념을 빌려 불교를 통역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본디 불교 관념에 중국적 색채가 짙게 배어들었다. 또 이 과정에서 인도불교 문헌이 고대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옮겨지는 번역사업이 벌어졌다. 이 번역사업으로 불교는 본디 모습을 완전히 잊지 않고 뿌리를 간직할 수 있었다. 불교 관념은 유학자들의 저항에 부딪쳐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13세기 이후 등장한 송·명 신유학의 발흥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