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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꽃 들려준 여인은 누굴까

등록 2006-04-06 18:32수정 2006-04-07 14:08

헌책방서 69년판 ‘보물’ 꽃그림책 발견
초판 1931년 펴낸 크레인은 누구일까
이국땅서 꽃전설 채집하고 그린 여성
‘선교사 남편’ ‘순천’ 단서로
행방 수소문 백년전으로 시간여행

커버스토리

과거로 가는 20일간의 시간여행은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권의 책에서 비롯됐다.

3월9일 종로구 혜화동의 헌책방 혜성서점을 찾았을 때 주인 전순인씨는 란 책을 건넸다. 보통 단행본의 두 배 크기에 하드커버, 금색 제목을 인쇄해 언뜻 보아도 예사롭지 않았다. 속살 역시 고급종이에 수채화 꽃그림 40여장을 따로 인쇄해 붙여 출판 문외한이 보아도 범상치 않았다.

몇 권의 다른 책과 함께 배낭에 넣고 회사로 들어온 나는 그 책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한국의 꽃과 전설’로 번역됨직한 제목의 이 책의 지은이는 플로렌스 헤들스턴 크레인. 1969년 서울 가든클럽에서 삼보출판사를 통해 찍은 1000부 한정본 가운데 43번이다. 초판은 1931년 일본 산세이도출판사에서 펴내고 미국 맥밀런사에서 배포했다.

1931년, 그 이른 시기에 한국의 야생화를 그리고 전설을 채집하여 책으로 엮은 자는 도대체 누군가. 초판과 재판의 서문은 지은이의 정체를 조금 보여주었다.

<미시시피 출신. 1913년 갓 결혼해 남편인 존 커티스 크레인 목사와 함께 한국에 옴. 미 남장로교회 관할인 순천지역에서 머물며 남편과 함께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학생들에게 산업미술을 가르쳤음. 틈틈이 야외에 나가 야생화를 스케치하고 노인들로부터 꽃에 얽힌 전설을 채집하고 남편은 한국의 옛책에서 정보를 찾아냈음. 1926년 휴가 때 미국에 간 그는 물주를 잡아 1931년 이 책을 펴냈음. 분류와 학명은 도쿄대학 식물학과 타케노신 나카이 박사와 케이조대학 쯔토무 이시도야 박사의 자문을 구했음.>


140여개 식물은 한창 때를 기준으로 월별로 나눠 학명, 향명, 쓰임새 외에 꽃말과 얽힌 이야기를 붙였다. 엉겅퀴, 나팔꽃, 찔레, 고들빼기, 동백, 철쭉, 모란, 민들레, 패랭이꽃, 괭이밥 등 눈에 익은 것 외에 히어리, 개불알꽃, 병꽃나무, 범부채, 금불초, 물칭개나물(노야긔), 순비기나무, 달네깨비(닭의장풀), 큰각시취, 청미래덩굴 등 생소한 것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털마삭줄, 동의나물, 큰꽃으아리, 설무초, 송이풀, 덥글력굴(누른종덩굴), 자주꿩의비름, 전출라, 마타리, 네귀쓴풀은 듣도보도 못한 이름의 식물이다. 그게 그것인 줄 알았던 제비꽃도 그냥 제비꽃 외에 호제비꽃, 알록제비꽃, 털제비꽃, 흰젖제비꽃, 흰털제비꽃, 고깔제비꽃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해당화에는 용궁처녀와 지상총각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맨드라미에는 닭싸움으로 잃은 황금닭을 묻은 데서 피어나 닭벼슬을 닮았다는 전설을, 할미꽃은 잘 나가는 두 딸한테 박대받고 나무꾼 아내인 셋째딸을 찾아가다 죽은 할미 이야기를 덧붙여 까맣게 잊힌 옛 이야기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지상의 처녀를 사랑한 별의 정령이 서린 봉선화, 사랑하는 여인에게 꽃을 꺾어 주려다 익사한 총각을 기리는 물망초, 풀과 나무를 다 태우는 용을 물리친 장사의 피가 흘러 피어난 비비추, 종달새의 곡예비행에 넋이 빠져 넘어지는 통에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제비꽃 등은 서양설화. 1929년 당시 일본을 통한 서양의 영향이 무척 컸음을 보여주었다. 배롱나무(백일홍나무)에는 동서양의 전설이 한꺼번에 뒤섞여 채록돼 있다. 또 제비꽃에서는 고개숙인 꽃을 따 서로 걸고 당겨 누가 이기는가를 내기했던, 고추에서는 “어려서 파란치마, 커서는 붉은치마를 입는 게 뭐게?”라며 수수께끼놀이를 했던 어렸을 적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주말이면 산을 쫓아다녔으면서도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겨우 구별하고 물봉선과 동자꽃을 눈동냥한 정도인 나의 눈에 상당부분 모르는 식물들에 관한 책을 엮어낸 한 서양인의 노고가 책에 포함된 수채화만큼이나 아름답게 비쳤다. 본격적인 탐색을 시작했다. 교회사연구소(소장 옥한음)에서 알려준 지은이의 남편 크레인 목사에 관한 사실.

<미시시피대학, 유니언신학교 졸업. 1913~1938년 한국에 머물며 평양 장로회 신학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순천선교부에 소속돼 순천 매산학교, 전주 신흥학교, 광주 소피아학교, 목포 정명학교 등 미션스쿨의 창립 운영 감독을 맡았음. 신앙이 깊어 폐교를 불사하며 신사참배에 반대했음. 1946~1956년 2차로 한국에 와 순천에서 활동>

이어 순천 매산고등학교, 광주 호남신학대학교에 전화를 걸고, 인터넷에서 미국의 족보를 뒤진 결과는 몇가지 단편적인 사실을 추가하는 것으로 그쳤을 뿐 속절없이 일주일이 흘렀다. 그러다 우연히 <크레인 가족의 한국선교>(임춘복 지음, 한국장로교출판사 펴냄)란 책을 발견했다. 1999년에 발간된 그 책에는 그들 가족의 활동상이 상술돼 있을 뿐더러 크레인 목사 부부, <한국의 야생화>에 실린 수채화 외에 크레인 목사 부부의 묘비사진까지 실려있는 게 아닌가. 기쁜 동시에 실망스러움. 정확히 말해 무척 당혹스러웠다. 더 이상 알아보고 자시고 할 일이 없어진 것. 하지만 미국의 한 집안 사람들이 한국에 와 이름없이 봉사한 사실은 기독교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내게도 이해하긴 힘들지만 적지않은 감동을 주었다.

교회사연구소 ‘똑똑’
미국 족보 뒤져보니
일가족 모두 한국땅서 헌신
아들 폴이 쓴 ‘한국 안내서’
어느 헌책방서 만난 것으로
행복한 여정은 끝났다

존 커티스 크레인 목사(1888~1964)=미시시피 야주시 출신. 미시시피대 동창으로 식물학과를 졸업한 플로렌스와 1912년 결혼. 1913년 전남 순천 배치. 흙집에서 학생 12명으로 매산학교를 열었음. 순천지역 주일학교 15곳. 70개 교회 개척. 1923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가르침. 1927년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 37년 평양신학교 조직신학 전임교수. 평양으로 이사. 일제 탄압으로 연금돼 있다 1941년 탈출해 귀국. 4년동안 <조직신학> 저술. 1946년 다시 한국행. 49년 심장 나빠져 귀국. 1954~56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플로렌스 헤들스턴 크레인(1888~1973)=대학 졸업반 때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월드페어에서 미술부 최우수상. 남편과 함께 1913년 한국행. 미술 가르침. 학교에 공예실과 양잠실 만들어 단추, 테이블보, 손수건 만들기, 명주짜기를 가르쳐 학생들에게 학비를 벌게 함. 한달에 한번 지역인사, 학자들과 모임 열어 시를 읊고 감상하고 장식해 놓은 들꽃들의 이름과 용도 전설 등을 물어 채집함. 평양외국인학교, 평양여자신학교에서 가르침. 시간이 나면 꽃과 들풀 그리기를 즐김.

재닛 크레인(1885~1979)=크레인 목사의 3년 위 누나. 동생으로부터 한국에 관해 듣고 1919년 한국행. 전주 젼킨여자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공예부를 지도. 코바늘, 뜨개질을 가르쳐 학비를 벌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음. 무료로 피아노 가르침.




폴 스캐킷 크레인(1889~1919)=크레인 목사의 동생. 형에 이어 한국에 와 목포에 배치되어 교육분야 맡음. 1919년 수원에서 교통사고사. 막내동생 윌리엄 얼 크레인은 두 아이를 두고 사망한 둘째형의 형수 캐서린과 결혼해 해로.

릴리언(1915~?)=크레인 목사의 딸. 순천 생. 1936년 선교사 톰슨 서덜과 결혼해 1938년 한국행. 순천에 배치돼 아버지가 평양에 가면서 빈 자리를 메움. 1940년 감시 심해 귀국.

폴 쉴즈 크레인(1919~2005)=크레인 목사의 아들. 존스홉킨스대 의대 졸업. 평양외국인학교 시절 동창인 소피 몽고메리(존스홉킨스대 간호대학 졸)와 1942년 결혼. 1947년 한국행. 이듬해 전주 예수병원을 다시 열어 일본 의사들이 떠난 공백기에 환자들을 돌봄. 50년 간호학교 세워 근대 간호교육 과정 운영. 6·25때 야전병원서 총상환자 치료, 군의관 지도. 1958년 예수병원 밖에 버려진 7살 여아한테서 회충 1천마리가 나온 것 알고 여론을 환기해 기생충 박멸운동에 불붙임. 61년 박정희-케네디 회담 등 4차례 한-미 정상회담 통역. 65년 6주간 미국 남부 순회 40만달러 모아 예수병원 현대식으로 지음.

이상 아홉 명의 크레인 가족이 대를 이어 먼 한국땅에서 사랑을 실천한 희귀한 사례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1967년에 나온 또 한 권의 책을 앞에 두고 있다. 폴 쉴즈 크레인이 지은 (국제출판사 펴냄). 3월30일 서울역 앞 북마트에서 발견한 이 책은 초보 외국인을 위해 한국인의 습성과 관례, 예절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권말의 ‘한약조제에 쓰이는 한국의 야생화’는 그의 어머니 플로렌스가 지은 책의 내용과 상당부분 겹쳐 있다. 36년 거리를 두고 어머니와 아들이 책을 통해 정겹게 만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떨어져 다른 헌책방에 묻혔던 두 권의 책을 한데 모아 잠시나마 그들의 행적을 좇아보았던 20일간의 여행은 행복 그 자체였다.

※ <한국방송>은 2004년 플로렌스의 책을 처음 발견한 양 보도했으나 그 전해인 2003년에 이미 <한국의 야생화 이야기>(윤수현 옮김. 민속원 펴냄)로 번역서까지 나와 있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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