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를 비롯해 여러 지자체들이 '영어마을' 정책을 폈으나 운영 적자 등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은 바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여의도 국제금융지구의 ‘영어 친화 도시’ 조성이 속도를 내고 있다. 외국인들이 생활하기 편한 언어 환경을 만들겠다는 취지다. 이를테면 도로 안내 표지판에 한국어보다 영어를 먼저 표기하고, 병원의 문진표나 부동산 계약서를 영문으로 만들어 외국인들이 불편해하는 문제부터 해결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식당에 영문 메뉴판이 담긴 태블릿 피시(PC)를 보급하고, 버스의 영어 안내 방송도 강화한다. 최종적인 목표는 외국으로부터의 투자 유치다.
서울이 싱가포르에 비해 모자랄 게 없는데, 유독 영어 때문에 아시아 금융 허브 자리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이 현임 서울 시장의 생각이다. ‘영어 친화 도시’ 구상의 배경이기도 하다. 과연 맞는 말인지 국제금융 전문가들의 토론이 필요해 보인다. 그간 지자체장들이 나서서 ‘영어 친화 도시’를 만들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부산, 인천, 제주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한다.
영어 친화적인 여건을 만들겠다는 것은 글로벌 환경에서 타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국어 역차별 정책은 참으로 엉뚱하다. 글로벌 금융 허브를 만들고 외국 자본 투자자들을 위한 것이라지만, 알파벳을 한글보다 앞세우는 표지판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절대 다수인 서울시민의 불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것인가. 영어 표기를 함께 쓰면 되지 한국어보다 앞세울 것은 아니다. 서울시청을 굽어보는 세종대왕상이 눈물지을 일이다. 시장 원리로 작동하는 언어 환경 개선이 아니라, 서울에서의 투자와 금융 거래 활성화를 제약하는 법제도 규제부터 혁신해야 하지 않을까.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서울시는 여의도를 ‘영어 친화 도시’로 만드는 사업의 일환으로 옛 문화방송(MBC) 부지에 영어도서관과 키즈카페를 만들 예정이다. 서울시는 해당 건물을 공공기여(기부체납) 받은 영등포구와 이 방안을 협의 중인데, 시설 조성만이 아니라 매년 들어갈 수십억 원의 운영 비용 문제를 조율한다고 한다. 그런데 영어도서관이 그렇게 급하고 필수적인지는 의문이다. 서울시는 시민을 위한 공공도서관 환경이 국내 지자체 중에서도 하위권이기 때문이다.
‘2022 한국도서관연감’에 따르면, 공공도서관 1관당 봉사 대상 인구는 서울시가 4만8766명으로 전국 평균인 4만2747명보다 많다. 인구 비례로 볼 때 다른 지역보다 도서관 수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시민 1인당 공공도서관 장서량은 1.68권으로, 전국 평균인 2.34권에 비해 훨씬 적을 뿐만 아니라 17개 지자체 중 최하위다. 이처럼 시민을 위한 도서관과 책이 모두 부족한 서울시에서 외국인을 위한 영어도서관부터 만들겠다는 것은 공감이 어렵다. 금융 허브 구상과 영어도서관의 필연성도 찾기 어렵다. 즉흥적이라는 뜻이다.
‘영어 친화 도시’를 하더라도 수도 서울의 정책이라면 모국어 우선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영어도서관 계획은 시민의 공공도서관 접근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재고가 필요하다. 나아가 서울 시장 공약으로 큰 예산을 들여 시행하는 야외 도서관 모델인 ‘책읽는 서울광장’, ‘광화문 책마당’ 운영도 좋지만, 좀 더 시민의 일상과 밀착되고 독서 소외계층의 사각지대를 촘촘히 채우는 ‘독서 친화 도시’부터 만들 일이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