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현 지음 l 창비(2023) 주민현의 시는 우리에게 입구와 출구를 다른 곳에 두어보자고 제안하는 것 같다. 어떤 상황을 이해하고자 할 때 직관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의미만을 전부라 여기지 말고, 거듭 생각함으로써 기어코 다른 의미에 다다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건네는 것이다. 가령 사물의 구별이 쉽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밤”은 주민현의 시에선 “검은” 형태 그대로 남겨지지 않는다. 시는 오히려 “무수히 많은 빛들의 땅으로 이루어”지는 시간대로 ‘밤’의 의미를 뒤집음으로써, 진실과 거짓의 판명이 어려운 시절이란 곧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의 여로가 펼쳐지는 때일 수 있음을 알린다. 이는 나아질 기미 없이 가로막혀버린 듯한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든 전환해낼 방도를 찾아 나서자고 독려하는 태도에 가깝다. “밤에는 차선을 구별하기가 힘들어지고/ 서로의 실루엣을 가볍게 통과하고// 밤이 검은 건 우리가 서로를 마주 봐야 하는 이유야// 어둠 속에서 이야기는 생겨나고/ 종이 한장의 무게란/ 거의 눈송이 하나만큼의 무게이겠으나// 무수한 이야기를 싣고 달리는 선로만큼 납작하고/ 가슴을 가볍게 누르는 중력만큼이나 힘센 것// 한장의 종이는 이혼을 선언하는 종지부이거나/ 사망신고서/ 찢어버린 편지이기도 하지// 내가 한장의 종이를 들고/ 전봇대 위로 올라가 홀로 전기를 만지던 당신의 손을 붙잡는다면// 백만 볼트의 전기가 흘러 당신의 입술과 함께 덜덜덜 떨리면/ 세상이 몹시 외롭고 이상한 별처럼 보이겠지// 아주 깜깜한 밤은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외딴 우주 같아// 하지만 밤을 뒤집어보면/ 무수히 많은 빛들의 땅으로 이루어져 있고// 밤과 새벽 사이 무수한 빛의 스펙트럼을 밟고/ 오늘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무겁다지만/ 이야기를 품은 인간의 무게만 할까,// 어떤 종이에는 불법 점거의 위법 사항이나/ 파산에 대한 위협적인 말들이 적혀 있고// 법률 서적을 성실히 교정보는 오후에// 위법과 과실에 대해, 어떤 치사량에 대해/ 세상은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지// 그러나 낮과 밤 그 사이 시간에는 이름이 없고/ 떠난 사람의 발자취에는 무게가 없고// 외주의 외주의 외주가 필요했던/ 치사량의 노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홀로 이야기의 성을 맴돌며/ 잠들 수 없는 한 사람의 고독한 뒷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밤에도 어떤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어.”(‘밤이 검은 건’ 전문) 시인은 누군가에겐 사소하기 짝이 없는 “종이 한장의 무게”에서 온 우주에 영향을 끼치는 중력을 읽어낸다. “한장의 종이”는 누군가의 목숨을 함부로 종결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노동이 가진 숭고한 의미를 지켜주기도 하며, 어떤 경우엔 누군가를 세상의 테두리 바깥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종이 한 장의 무게는 “이야기를 품은 인간의 무게”. 그러므로 “한장의 종이”에서 시작한 어떤 기록을 그 안에만 가두어 둘지, 아니면 많은 사람의 발자취로 이해해나갈지 끊임없이 고민할 것. 이는 그럴듯한 기록의 외피를 입고 (명료히, 간편히 말할 수 있는 것만을 선호하면서) 너무 많은 죽음을 그저 그런 죽음으로, 그저 그런 삶으로 폄하하는 권력은 끝까지 밤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님을 분별해내지 못할 것이란 얘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투표용지 한 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장의 종이”가 종내 어떤 말을 그이들에게 돌려줄지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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