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핸드
조용우 지음 l 민음사(2023)
시에 구체적인 지명이나 상호명, 또는 어디선가 마주칠만한 고유명사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런 말들이 등장하는 시는 좀 더 천천히 읽게 된다. 생활의 풍경을 이루는 말들이므로 거기에 기대어 우리 머릿속에 구체적인 그림이, 삶의 한 장면이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으레 특별한 말들만이 문학작품에 쓰일 수 있다고 여기던 이들도 시 한가운데서 일상 언어가 숨 쉬는 정황을 마주하게 되면, 자신이 있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문학이 길어 올리려는 진실이 열리기도 한다는 생각을 새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조용우의 첫 시집에 수록된 몇몇 시들은, 생활의 한복판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시선이 바로 그 자리에서 그냥저냥 이어져 왔던 생활을 다시 살피는 제2의 시선으로 거듭나는 상황을 다룬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삶의 구체성을 떠나보내지 않을 때 만들어지는 생각을 관념으로 휘발시키지 않고자 애쓰는 가운데 시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의 이면, 혹은 현실 너머까지 살피는 시야를 확보한다.
“비가 또 내린다/ 때죽나무는 흔들린다 다 잊어버린 것처럼 눈을 감고 멀리/ 흔들리는 것에는 영혼이 담겨 있는 것 같고/ 영혼이 있다고 해서 모두/ 살아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담장에 줄지어 걸려 있는 새장들을 가리키며/ 너는 물었다 저건 전부 진짜 새냐고/ 가짜 새를 우리에 넣어 두는 일은 없지 않느냐며/ 내가 웃으며 답할 때 쥐 같은 빛이/ 우리를 스쳐 새장 아래를 훑어갈 때/ 지혜철물을 지나/ 디저트홀릭이 사라지고 부활약국 유리문이/ 깨지고 셀프코인빨래방 자리에 있던 국숫집 이름을 까먹으면서 태풍은/ 지나가고 창문에 붙인 테이프를 떼지 않은 집들이/ 가끔 보인다 거기서 살 수 없어도/ 누가 살고 있대도/ 가짜 새는 빠져나갈 수 없는/ 구멍을 까맣게 잊고 나는/ 휴일 오후 빨래방에 간다/ 이불을 들고 서서/ 이주민들은 세탁기 안을 쳐다본다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린다”(‘누가 가짜 새를 우리에 두고’ 전문)
누군가가 강압적으로 어떤 이를 움직일 수 없도록 “우리”에 가둬둔다면 그것은 “진짜 새”, 그러니까 “흔들”릴 줄 아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다고 했을 때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이도 “진짜 새”와 같이 “살아있는” 존재, 또는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잊지 않고 들여다볼 줄 아는 이들일 것이다.
시인은 태풍이 훑고 간 바람에 사라지거나 깨어진 동네를, 그럼에도 “창문에 붙인 테이프”로 버티고 있는 동네를 지나가는 것 같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곳을 지나면서 지금 이 삶을 삶답지 않게 가로막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느끼는 것도 같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진짜” 삶이라면, 단지 “가짜”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처럼 가둬진 곳을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비가 창살처럼 생활을 가둬둔다 해도, 흔들릴 줄 아는 힘을 발휘하면서.
관념적으로 형성된 생각으로 누군가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고, 그렇게 만들어진 인식을 기정사실화 하려는 정치권력의 과오가 자주 드러나는 요즘이다.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을 붙드는 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그제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양경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