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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3일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다. 출판과 독서 활동을 장려하고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책 생태계는 사막화되고 있다. 여기에 일조하는 것이 대학 교재의 불법 복제 문제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는 불법 복제한 피디에프(PDF) 파일을 대량으로 유통한 업체를 적발하고, 대학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대학 교재의 디지털 파일을 영리 목적으로 거래하는 행위가 성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3월 신학기를 맞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보호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합동으로 대학가 출판물 불법유통을 점검한 결과다. 대학 교재를 대학가 복사집에서 복사하거나 스캔한 파일을 유통하는 재래식 방법은 물론이고, 근래에는 구성원이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복제된 파일 거래가 성행한다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외국 원서가 포함될 경우에는 국제적 망신살이다. 사회적 경종을 울리기 위해 판매자와 구입 학생을 원칙적으로 쌍방 처벌로 엄벌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책이 안 팔리니 학술서와 대학 교재를 발행하는 출판사들은 절체절명의 위기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를 조장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대학 사회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단지 학생들의 교재 구입비 부담 회피, 낮은 저작권 인식, 종이책보다는 디지털 기기를 좋아하는 매체 선호도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출판사들이 대학 교재를 피피티(PPT) 강의 자료로 만들어서 대학교수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상당수 교수는 교재로 쓰고자 하는 책을 펴낸 출판사에 피피티 강의 자료를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한다. 대학의 교육시스템에 강의 자료를 올리고, 수업 시간에도 활용하려는 목적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중소형 출판사들은 외주 비용까지 들여 피피티 강의 자료를 만들어 제공한다. 교재 채택을 위한 울며 겨자 먹기다. 그렇지만 실제로 판매되는 책은 수강생의 10분의 1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교수가 제공하는 피피티 강의 자료만으로도 교재 구입 필요성이 충족된 학생들이 교재를 살 리 만무하다. 주교재가 없는 수업도 늘고 있다.
이제 교수 사회는 출판사에게 피피티 제공 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출판사 단체는 피피티 자료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동시에 선언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의 정리까지 외주화하는 것은 교수 사회의 잘못된 갑질이다. 교수자의 본분을 망각한 책임 방기이자 학술출판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행위다. 교육부도 이런 실태를 파악해 적절한 규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대학 교재가 디지털 파일로 불법 유통되거나 판매되는 폐해에 대해 교육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
출판계에서도 전자책(PDF) 공급을 늘려 디지털 환경에 조응해야 한다. 학술도서 전문 출판사들이 참여한 학술전자출판협동조합의 ‘아카디피아’를 통해 판매 중인 전자책은 약 2만5000종이지만, 아직도 전자책이 없는 학술도서가 훨씬 많다. 종이책 판매 감소와 불법유통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종이책 판매만 고수하는 것은 ‘난센스’다. 불법복제 근절 대책 마련과 함께 활로 마련을 위한 자구노력이 병행되어야겠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