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 작가의 작품 ‘정방폭포’(2020). 메디치미디어 제공
제주4·3 때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무작정 산으로 몸을 숨긴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제주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자주 먹는, 제주 곳곳에 자라는 산딸나무의 열매가 피신한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더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의미심장한 그림과 글들로 제주4·3의 역사를 조명하는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메디치) 제목에 담긴 ‘틀낭’은 바로 이 산딸나무를 가리키는 제주 말입니다. 이처럼 제주 사람들의 고난이 깊이 배어 있기에, 지은이들은 4·3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틀낭을 골랐다 합니다.
책 속에 담긴 그림들은 모두 미술작가 이수진이 ‘보리아트’로 만들었습니다. 보릿대를 갈라서 펼치고 이를 이어 붙인 원단 위에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이수진 작가는 “4·3 이후 폐허가 된 마을터에서 자란 보리줄기를 주소재로 삼고, 4·3 현장의 대지에서 수집한 풀, 나무, 흙 등을 사용”해서 4·3의 역사적 진실과 의미를 알리는 작품들을 만들어왔습니다. 책에 실린 그림들에도 “제주의 대지에서 제주의 공기와 햇살, 바람을 맞으며 제주 사람들의 역사를 품고 자란 동백꽃잎과 감귤 껍질, 나뭇잎, 이름을 알 수 없는 풀줄기들”이 쓰였다고 합니다. 제주에서 온 것들로 표현한 제주의 아픔이라니, 지은이들이 4·3의 역사를 알리고 함께 나누기 위해 기울인 정성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입니다.
틀낭에 핀 ‘진실꽃’은 ‘속솜허라’(표준어로는 ‘입 다물라’) 쏟아졌던 말들을 뚫고 나왔습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입 다물어야 했던 시간이 너무도 길었습니다. 그 누가 종주먹을 들이대도, 우리는 그 폭력과 야만의 시기로 다시 되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수진 작가의 작품 ‘너’(2020). 제주4·3 당시 토벌대의 혹독한 ‘빨갱이’ 사냥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 대신 죽을 사람을 손가락으로 지목해야 했다. 메디치미디어 제공
이수진 작가의 작품 ‘가메기 모르는 식게’(2022).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란 뜻으로, 누가 어떻게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죽음들이 너무 많아 생겨난 말이다. 메디치미디어 제공
이수진 작가의 작품 ‘평화의 나무’(2020). 메디치미디어 제공
최원형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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