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질문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재경 옮김 l 위즈덤하우스(2022)
2017년 8월 마거릿 애트우드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스트랫퍼드의 뒷길 벤치에 앉아 시를 썼다. 그 시를 쓰기 직전 애트우드는 보도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무릎 상태는 좋지 않았다. 천천히 걷다 보니 ‘사색’을 하게 되었다. 마침 눈앞에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공원 벤치였다. 그래서 애트우드는 벤치에 앉아 ‘한없이’라는 시를 썼다. 그녀는 왜 혼자 걷고 있었을까?
애트우드는 1971년부터 남편 그레임과 함께 캐나다, 프랑스, 스코틀랜드 본토 등 온갖 곳을 걸었다. 적어도 그레임의 무릎이 애트우드의 무릎보다 먼저 나가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날 그레임은 민박집에 남고 애트우드는 혼자 생필품을 사러 나갔던 것이다. 그레임은 2012년 치매 진단을 받았다. 2017년이면 둘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둘은 어떻게 했을까? “시름의 장막 아래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 애썼고 “함께 하고 싶었던 일을 많이” 해냈고 “매시간 행복을 힘껏 짜냈다.” 이것은 애트우드의 이야기고 이제 내 이야기를 하겠다.
지난 월요일 나는 처음 가보는 경기도의 길거리에 혼자 서 있었다. 찬 바람이 불어오자 또르르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나는 지난해 꼭 하고 싶은 프로그램의 기획서를 작성했다. 기세등등 일을 시작하려던 참에 기획이 취소되었다. ‘뭐, 내년에 하면 되지!’라고 성숙하게도(!) 나를 위로했다. 드디어 해가 바뀌었다. 나는 열정을 불태우며 기획서를 두 개 썼다. 둘 다 심사에서 탈락했다. 그 소식을 듣자 무릎이 풀렸다. 최근 3년 사이 나의 모든 기획은 열매를 맺지 못했고 나는 실패라는 면면히 이어지는 흐름 속에 서게 되었다. 탈락 소식을 들은 바로 그날, 나는 경기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 엄청나게 막혔고 엄청나게 많은 택시비가 나왔다.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렸다. 택시에서 내려 지하철역 이름을 확인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역 이름은 놀랍게도 ‘초월’이었다. ‘초-월’이라는 글자가 이제 막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대문짝만하게 떠 있었다. 이것은 슬픈 마음을 ‘초월’하라는 계시인가! 물론 초월할 예정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때 <타오르는 질문들>(중요한 질문들이 가득한 책이다. 중요한 질문은 한마디로 하면 ‘그래서 이다음에 어떻게 된다고?’이다.)이라는 책에 나오는 애트우드의 시 ‘한없이’가 떠올랐다.
“이제는 퇴색해가는 낡은 단어입니다./ 한없이 원했습니다./ 한없이 갈망했습니다./ 나는 그를 한없이 사랑했습니다./ 나는 인도를 따라갑니다./ 고장 난 무릎 때문에 조심하면서/ 하지만 당신이 상상하는 것과 달리/ 나는 개뿔도 신경쓰지 않아요./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날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각기 빛나고. 제각기 혼자고./ 제각기 가버리는 날들./ 그중 일부를 종이에 적어서 서랍에 넣었어요./…// 한없이 사랑하는 것들이 여기에 모여 있어요./ 이 닫힌 서랍 안에,/ 이제는 퇴색해가요. 당신이 그리워요./ 여기 없는 사람들, 먼저 떠난 이들이 그리워요.// 아직 여기 있는 이들조차 그리워요./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없이 그리워요./ 나는 여러분 때문에 한없이 슬퍼요//…”
이 시를 99.99% 모방해서 나는 ‘초월 역에서’라는 시를 썼다. 그중 일부다. “개뿔! (탈락은) 신경쓰지 않아요./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주로 실패한 기억밖에 없는 내가 당신들을 그리워한다는 거예요./ 산 사람들, 죽은 사람들이 그리워요./ 나는 한없이 시도할 거예요./ 내가 할 일을 해야만 해요./ 이것이 내 유일하고도 진실한 사랑 이야기예요. 개뿔!”
정혜윤 <CBS>(시비에스)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