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앨리 스미스 지음, 이예원 옮김 l 민음사(2021)
크리스마스는 일 년에 한번쯤 뭔가를 욕심내도 괜찮은 날 같다. 산타의 선물부터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까지 평소에는 꽁꽁 감춰두었던 바람을 솔직히 꺼내놓아도 크게 부끄럽지 않은 날이다. 한밤 누추한 곳에서 환한 빛이 탄생한 기적의 날이니까. 그러니 찰스 디킨스의 유명한 우화에서처럼 크리스마스에는 유령이 찾아와 우리 삶을 뿌리째 뒤흔들어도 그리 놀랍지 않으리라.
소피아 클리브스는 세간의 기준으로 ‘성공을 거둔’ 중년 여성이지만 방이 열다섯 개나 되는 큰 집에서 홀로 쓸쓸하게 살아간다. 소피아에겐 데면데면한 사이의 아들 아트가 있다. 아트는 크리스마스에 연인 샬럿과 함께 소피아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했지만, 샬럿과 정치적인 문제로 크게 다투고 헤어지는 바람에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민자 젊은 여성 럭스에게 돈을 줄 테니 샬럿의 행세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아트와 럭스는 소피아의 집을 찾아가는데, 영민한 럭스는 소피아의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져 도움이 절실한 상태임을 깨닫고 근처에 산다는 소피아의 언니 아이리스에게 연락하자고 제안한다. 소피아와 아이리스 자매는 성격과 정치관, 세계관이 정반대라 오래도록 불화해왔다. 소피아는 현실적이고 냉철한 사업가로 살았고 아이리스는 온갖 정치 운동에 뛰어들며 방랑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던 것. 혈연관계로 맺어진 소피아와 아트, 아이리스는 여러모로 낯선 ‘완벽한 타인’ 럭스 덕분에 처음으로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다.
<겨울>은 브렉시트 이후 영국 사회가 마주한 최대의 질문 ‘타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소설로 풀어낸 앨리 스미스의 계절 4부작 중 두 번째 소설이다. 이민자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공공연해진 현재의 영국 사회를 예리하고도 섬세하게 짚어내는 계절 4부작은 어느 작품보다 정치적이지만 작가가 타인과의 소통의 도구로 제시하는 것은 예술이다. 특히 작가가 시대의 폭력과 차별에 희생당한 여성 혹은 여성 예술가를 소설 속에 복원해낼 때 우리는 반가운 마음으로 과거와 인물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 당일 네 사람이 소피아의 집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럭스가 불쑥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것에 관해 들려준다. 캐나다의 어느 도서관에서 셰익스피어의 <심벨린> 고서 종이와 종이 사이에 남은 장미 봉오리의 흔적을 보았던 것. 시간이 흘러 아트는 겨울에 만난 럭스를 떠올리고 럭스가 말한 꽃의 흔적을 온라인으로 찾아본다. 아트의 눈에 그것은 꽃의 자국이기도 하고 꽃의 유령이기도 하다. 실물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생명의 흔적이다. 이제 아트는 그런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사람이 되었고, 그게 바로 기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변화인데, 그 기적을 나눠준 사람은 이 시공에서 가장 누추한 곳에 기거하는 이민자 젊은 여성 럭스였다. 럭스는 빛이라는 뜻. 철저히 외로웠던 아트의 가족에게 환한 기적을 나눠주고 홀연히 사라진 사람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소설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