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협동센터(CCBC) 디렉터를 맡고 있는 테사 마이클슨 슈미트(왼쪽)와 다양성 지표를 관리하는 매들린 타이너(오른쪽). 11월5일 <한겨레>와 만난 이들은 “우리의 작업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고 그것이 제대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발전해왔다”고 말했다.
‘어린이책협동센터’(CCBC·Cooperative Chindren’s Book Center)는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학 교육대학원 안에 설치된 어린이책 관련 기관이다. 애초 1963년 위스콘신 주정부와의 협력 아래 학교와 도서관들이 갖고 있는 어린이책 가운데 역사적인 가치가 있어서 보존해야 할 책들을 비치하기 위한, ‘역사적 수장고’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현재 이곳의 기능은 훨씬 확장됐으며, 그 확장된 기능이 미국 어린이청소년문학 출판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달 5일 이곳에서 만난 디렉터 테사 마이클슨 슈미트와 사서 매들린 타이너는 오늘날 어린이책협동센터는 일종의 연구 기관이며, 가장 중요한 기능은 “책 검토”(Book Examination)라고 말했다. 어린이책협동센터는 도서관이지만 책을 사지 않는다. 출판사들이 출판할 책들의 견본(copy)을 보내오면 이를 모아 내용을 검토하고, 리뷰를 작성하고, 추천할 만한 책들의 목록을 꼽는다. 실제로 책을 사는 것은 위스콘신주에 있는 학교와 도서관들인데, 어린이책협동센터의 연구는 이들이 어떤 책을 사서 비치해둘 것인가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준다.
어린이책협동센터의 여러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것은 ‘다양성 지표’(Diversity Statistics)다. 미국에는 아프리카계 어린이문학 작가에게 주는 ‘코레타 스콧 킹’ 상(1922년 제정)이 있다. 1985년, 어린이책협동센터 디렉터였던 제니 무어 크루즈는 한 해 2500여권에 이르는 책들 가운데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책이 단 18권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흑인 작가의 책을 따로 셈해보는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다양성 지표는 그 카테고리를 1994년 ‘흑인’, ‘원주민’, ‘아시안/태평양’, ‘라틴계’ 등으로, 2018년에는 ‘흑인’, ‘원주민’, ‘라틴계’, ‘태평양 섬’, ‘아랍’ 등으로 늘렸다.
11월4일 오전, 미국 매디슨에 위치한 위스콘신매디슨대 부설 ‘어린이책협동센터’(CCBC)에 이수지, 백희나 등 한국 작가의 작품 번역본들이 전시되어 있는 모습. 어린이책협동센터는 출판사들로부터 미국에서 출간되는 어린이책들의 견본을 받아 연구하는 활동을 한다.
이처럼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드는 등 어린이책협동센터가 인식의 범위 자체를 확장해온 과정은, “(자신들의 ‘소수자’ 정체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꾸준히 귀를 기울여온” 결과라고 슈미트와 타이너는 입을 모았다. 어린이책협동센터는 어린이책이 미국 사회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살피며 포착된 변화를 담아내기만 했을 뿐, 실제 변화를 만든 것은 자신들의 소수자 정체성을 인식하고 목소리를 높여온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다양성을 측정하는 카테고리는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또 같은 차원에서 ‘시장’의 구실이 크다. 슈미트는 “‘해리 포터’ 시리즈 이후로 어린이청소년문학이 ‘돈이 된다’. 그리고 과거 백인·남성 중심으로 형성됐던 출판 시장은 인종·젠더 등 모든 측면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도록 변해왔다”고 짚었다.
그렇다면 ‘흑인 작가에 의한’, ‘아시안 경험에 대한’ 책들은 실제 어떤 방식으로 분류될까? 다양성 지표 작성을 담당하는 타이너는 “‘의한’(by)을 확정하기 위해, 그 작가가 어떤 사람이며 스스로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지 개인 누리집부터 인터뷰, 소셜 미디어 등을 최대한 샅샅이 살펴본다. ‘대한’(about)은 작품 속 주요 캐릭터들과 그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이 책에서 어떤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지, 인물의 사회경제적 상태가 어떤지, 신체의 크기와 모양, 가족의 구성 등도 살핀다. 다양성 자체가 더욱 다양해지고 있는 오늘날, 정체성을 규정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예컨대 한 인물이 두 가지 인종적 정체성을 다 갖고 있거나, 종교, 장애, 젠더 등 다른 범주들과 뒤섞이기도 한다.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갈색 피부’로만 그려진 등장인물에 대해 단지 ‘갈색 피부’라는 최소한의 카테고리를 적용한다거나, 극소수지만 ‘식별할 수 없음’으로 표시하는 경우도 생긴다. 젠더의 사례를 들면, 70~80년대에는 보통 주인공의 친구가 동성애자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90년대에는 주인공 본인이 동성애자로서 ‘커밍아웃’을 하는 내용, 2000년대 이후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 등으로 “플롯이 진화”해가는 맥락도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일이 “편향되지 않은 지적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라 입을 모았다. 다양성 지표를 통해서든 ‘올해의 책’ 선정을 통해서든, 결국 수많은 책들 가운데 아이들이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다. 슈미트는 “오글거리게 들릴 수 있지만, 아이들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세상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우리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타이너는 “팩트를 가르치고, 감정을 경험하게 하고, 질문하게 만들고, 즐거움을 주는 등 책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모든 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덧붙였다.
매디슨/글·사진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다음주 3회 ‘낙관 너머 현실 ’이 나올 예정입니다.
※본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