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이마를 쓰다듬는 꿈속에서
유혜빈 지음 l 창비(2022)
몇 주 전, 청소년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한 책을 읽고서 쓴 글을 살핀 일이 있었다. 지금 열다섯, 여섯 정도 나이대의 청소년은 2014년엔 일고여덟 살 정도여서, 그이들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때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 못했다고 했다. 이들에게 2014년은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이 깊이 슬픔에 잠겨 있었던 해로, 혹은 뉴스를 보며 화를 냈던 해로 기억된다. 자신의 주위에 가득 차 있던 슬픔과 분노. 이는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세월호를 ‘제대로 알고 싶도록’ 이끈 원인이자, 살면서 자신이 이해해야 할 사건으로 각인시킨 요인이었다.
세월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일어난 참담한 사건을 왜 피해선 안 되는지, ‘사회적 감정’으로서의 슬픔을 존중하는 일은 공동의 기억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를 일러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해진 날짜 안에 슬픔을 잠시 소유했다가 털어버리도록 감정을 제한하는 작업이 아니다. 슬퍼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끝까지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유혜빈의 첫 번째 시집 <밤새도록 이마를 쓰다듬는 꿈속에서>에는 갈 곳 잃은 슬픔을 어떻게 맞이할지 고민하는 시선으로 그려진 시편들이 몇 실려 있다. 시인은 “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방 안에서 “어항의 물결이” 일렁이는 걸 보다가 지금의 이 풍경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슬픔이란 보이지 않아도 맹렬히 움직이는 것임을 감지하고(‘슬퍼하는 방’), 간헐적으로 “오래된 내” 모습과 함께 지금은 헤어진 사이로 짐작되는 “언니”가 찾아오는 시간을 맞이하면서 슬픔의 이마를 밤새도록 쓰다듬는 꿈을 꾸기도 한다(‘BIRD FEEDING’). 시인에게 슬픔은 다른 감정으로 이행하기 위해 거치는 정도의 단계가 아니다. 시인은 오직 슬퍼하는 길을 따라서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있음을 알고 있다.
“여름은 늦고// 줄기를 정리해야 하는 사람은/ 줄기를 정리하고 있다// 여름이 늦으면 늦을수록// 송이로/ 떨어지고 있다// 송이가 한낮의 틈에 낀다// 어쩐지 조금/ 비켜나 있다// 떨어졌어야 하는 곳에서// 여름내 마르지 않고// 불안과/ 초조와/ 조급함으로// 지나온 계절로/ 돌아올 것이다// 능소화 한낮의 틈새에 낀다// 그대로 계절을 살아남는다// 너의 기억보다 오래/ 너의 기억보다 큰// 능소화가”(‘한낮의 틈새’ 전문)
능소화 송이송이는 “지나온 계절”에 축적된 슬픔의 역사를 품고 “떨어”진다. 그리고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능소화는 “마르지 않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대로 계절을 살아남”아 “한낮”을 증언할 것이다. “조금” “비켜나 있”는 자리에 떨어진 능소화를 굽어살피면서, 시는 우리가 슬픔을 잃어버리지 않고 고통에 깊이 침잠할 줄 안다면 잊히지 않는 “기억”이 놓이는 자리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최근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요즘 우리는 대체로 울고 싶은 마음으로 지낸다는 걸 알았다. 10·29 참사를 겪고서 그 슬픔의 농도가 더욱 짙어졌다. 이는 개개인을 향한 심리적 위안만으로 해소될 게 아니다. 참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과 책임소재 규명, 정부의 진정한 사과,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 조치가 필요하다. 우리의 슬픔은 유가족과 피해자의 요구가 들리는 곁에 내내 있을 것이다.
양경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