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도 혼합 공간
김리윤 지음 l 문학과지성사(2022)
최근 유럽의 환경운동단체 몇몇은 기후위기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명화에 음식물을 끼얹는 시위를 하고 있다. 몇 주 전 독일의 환경운동가들은 모네의 작품 <건초더미>(Les Meules)에 으깬 감자를 쏟아내고 “우리가 먹을 것 때문에 싸우게 된다면, 이 그림은 아무 가치가 없을 것이다. 언제쯤 귀를 기울일 것인가?” 하고 외쳤다. 그림은 유리로 보호되어 있어 훼손되지 않았으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람객들, 당시 상황을 뉴스로 접한 이들은 충격을 받았다. 나 역시 그랬다. 인류가 축적해온 지적, 창의적 역량의 집합체로서 예술이 지닌 가치와 의미,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일을 줄곧 해왔던 내게 환경운동가들의 시위는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아름다움이 유리관 안에 갇힌 것에 불과하다면 어찌할지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당장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절박한 외침이 담긴 그이들의 행동은 미술관을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개방하고 있었다.
김리윤의 첫 시집 <투명도 혼합 공간>에 담긴 시편들은 언뜻 데시벨이 낮은 음성으로 조곤조곤하게 말을 건네는 인상을 남기는 듯하지만, 시를 이룬 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고요하게 읽힌다는 ‘시’ 장르에 대한 기대를 와장창 깨뜨리며 격렬하게 발신된다. 시집 제목에서 거론된 ‘투명’은 쉽게 보이지 않아서 없는 거로 치부해왔던,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을 가두고 있는 ‘유리관’을 연상케 한다. 투명한 유리관을 통과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빛이 어디에서 파생된 것인지, 그 유리관을 깨뜨리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묻는 시의 한 부분을 읽는다.
“(…) 12월엔 어디에서나 커다란 나무에 작은 전구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불빛이 들어오고/ 빛을 끄고 불을 켜면 다 똑같아 보이는// 세계의 근원은 이제 전기라고/ 인간은 빛보다 한참 느린 속도로 움직이면서 원하는 만큼의 빛을 만들 수 있다/ 운전자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 달릴 자동차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생명의 낭비를 줄여주는 기술입니다/ 그러나 너무 환한 곳에서는 생명을 낭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높은 조도에서는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밝게 빛나는 하늘과 흰옷을 입은 사람을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계는 점점 더 낮은 조도로 진화하고 있어/ 매년 20퍼센트 정도의 광량이 감소하고 있대// 희박한 태양광 아래에서 낮아지는 조도의 세계에서 우리는 함께 희박해지겠지 정말 좋은 일이다 좋은 미래가 오면, 도로 위에서 공들여 식별해야 할 산 것들이 없는 그런 미래가 온다면 생명이 낭비되는 일도 없을 거야// (…) // 아름답다 감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아름다움은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기로 작동되는 신이 들려준 이야기다” (‘재세계reworlding’ 부분)
밤이나 낮이나 빛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인간은 이토록 밝은 세계가 끝날 리 없다고 착각한다. 그 빛을 전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면서. 그러나 시는 “생명의 낭비를 줄여주는 기술”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그것이 곧 이 땅의 생명 자체를 모두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원하는 만큼의 빛을 만들”어 냈다고 자신하던 인간의 손으로 결국 “아름답다 감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는 세계를 끌어올 수 있다고.
양경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