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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우리의 슬픔은 힘이 세다

등록 2022-09-30 05:00수정 2022-09-30 09:56

양경언의 시동걸기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지음 l 문학과지성사(2022)

지난 9월17일 서울 중구 신당역 10번 출구에서는 백여명의 시민이 모여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렇게 모인 이들에게 그리고 그 자리의 뜻에 공감을 표하는 많은 이들에게 진은영의 시를 건넨다. 제목의 ‘단조로운’이란 표현은 얼핏 우리가 살아가는 참담한 현실에서 아무런 효력도 발휘 못하는(듯 느껴지는) ‘시’에 대한 반성을 담았다는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시는 ‘단조로운’에서도 ‘단조’와 ‘울다’라는 말에 먼저 반응하고자 한다.

“지나가는 개와 슬픈 고양이/ 트위터의 이름처럼/ 다정한 소녀들과 이야기하고 싶다// 사랑의 흰색에 대해 쓰면서/ 네가 얼마나 내 뺨을 창백하게 했는지// 내 사랑/ 한 줄로 된 현악기/ 울리거나 멈추거나// 나도 알아/ 내가 단조로……운 밤이라는 거/ 하얀 도화지에 흰 조각 모자이크// 죽은 이들의 이름을 다채롭게 사칭하면서/ 네 곁으로 가고 싶다// 모든 게 정확히 틀렸다/ 제 자리에서// 정확히 말해야 해, 정확히 말하기 싫어/ 무언가 검정 얼음 속에서 녹고 있어!// 꿈과 죽은 자들/ 시와 너는/ 똑같다// 모두 이곳에 없었던 것/ 없어서 내 심장이 소리쳐 불렀던 것”(‘단조로운 시’ 전문)

마치 “한 줄로 된 현악기”처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자리에 더 이상 있지 못하고 저 혼자 “울리거나” “멈추”는 소리로 남은 그녀를 절대 잃고 싶지 않은 고유한 한 사람으로 떠올리는 일이란 “내 뺨”이 “창백”해질 정도로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러니 그녀가 살아 고통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다했고, 살아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기억하는 행위는 “내가” 그리고 여기에 남은 ‘우리’가 “단조”로 슬피 우는 소리와 닮아 있다. 여성혐오 범죄가 구조적인 문제임을 모르는 척하느라 사건의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키는 관료들, 정치인들에게는 단조롭게 들릴 이 비가(悲歌)가 어두운 “밤”을 끌어들인다.

어쩌면 그 “밤”의 어둠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 적히면서 내는 잉크의 빛깔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네 곁으로 가고 싶”지만 갈 수 있는 길이 이젠 “없어서” 우리의 “심장”이 그녀를 향해 그녀가 살아 애썼던 시간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말들이 적히면서 내는 빛깔로. 혹은 그녀와, 그녀와 같이 “한 줄로 된 현악기”의 자리로 가게 된 또 다른 그녀들을 통해 알게 된 지금 “이곳에 없”는 ‘성폭력 없는 세상’, ‘여성혐오 범죄 없는 세상’, ‘성차별 없는 세상’을 “소리쳐” 요청하는 말들이 내는 빛깔로. “흰색” 종이에, 손팻말과 포스트잇에, “하얀 도화지에 흰 조각 모자이크”에 적히는 이것은 “이곳에 없”는 무언가를 ‘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소리쳐 불”러 내는 가운데 솟아나게 만드는 시와 같은 것. 다시 말해 그녀가 힘껏 손 내밀어 우리 손에 쥐여 준 ‘성폭력에 맞서 싸울 용기(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의 ‘피해자가 무참하게 죽어간 것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녀가 생전에 성폭력에 맞서 싸운 용기도 기억하자’는 발언에서 인용)’를 내면서 끝까지 적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 시인의 메시지가 맞다. 단 한 사람의 고통, 단 한 사람으로부터 빚어진 슬픔과 구체적으로 마주하는 일은 그 사람과 함께 속하고 싶고 함께 만들어가고 싶었던 세상을 그리는 일과 같다. 우리의 슬픔은 힘이 세다.

양경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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