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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귤 한 알의 기적

등록 2022-05-06 04:59수정 2022-05-06 11:30

[한겨레Book] 양경언의 시동걸기

햇볕 쬐기
조온윤 지음 l 창비(2022)

조온윤의 시집을 읽을 때 만날 수 있는 목소리는 홀로 있는 것 같지 않다. 시에 등장하는 ‘내’가 언제 어디서라도 꼭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다는 착각을 동반한 채 살아간다는 인상을 남긴다는 얘기다. 시집의 제목부터가 ‘햇볕 쬐기’다. 햇볕은 어느 한 사람만 특별하게 누리는 게 아니라 어린이와 어른, 풀과 나무, 개와 고양이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마땅하게 쬘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전하는 ‘햇볕 쬐기’에는 평등한 나눔에 대한 상상력이 깃들어 있다. 혼자 있는 순간에도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고, 모두가 조금씩 통증을 나누어 앓는다면 어딘가에 고립되어 있는 고통의 무게가 덜어지리라 여기는 것. 이런 생각을 빚어내는 착각이라면, 시인의 방식을 일컬어 착각이란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되겠다. 그보다는 함께 사는 세상에서 계속해서 길러야 할 감각이라고 해야 한다.

어린이날 백주년을 축하하면서, 차별과 혐오와 배제를 넘어 함께 살기 위해 우리가 가꿔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한 알의 귤에서 열 개의 귤 조각을” 발견하고 그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짚는 시를 읽는다.

“(전략) 한 알의 귤에서 열 개의 귤 조각을/ 메마른 입술처럼 얇은 표피를 벗기고 다시/ 수많은 알갱이를 발견하는 건/ 귤을 쥔 자의 마음이라고요// 그러니까 그것은/ 칼을 들이밀지 않아도 부드럽게 쪼개지는 것/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다섯으로/ 혹은 손가락이 부족할 만큼으로도 나뉘는 것// 한 알의 귤에서 몇 사람의 몫을/ 발견할 수 있느냐는 오롯이/ 귤을 쥔 자의 마음이라고요// 하루 몽상을 다 마치고 그림자를 끌며 가는 귀갓길에는/ 배고픈 저녁이 이미 절반쯤 삼켜버린 해를/ 손에 꼭 쥐는 시늉을 합니다/ 시간은 아직 내게/ 반쪽이나 건네주는구나, 홀로 중얼거리면서요// 주황색을 너무 많이 만진 사람처럼/ 손가락 끝이 누렇게 물들겠죠// 천만에, 나는 만져지지 않는 귤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내가 혼자이고/ 보이지 않는 이 외로움을 다정하게/ 건네받아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해와 까치와 그림자, 심지어는 여기에 없는/ 그에게라도 말을 걸며/ 오늘의 잔양을 나눠 갖는 이가 나만이 아니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릴 겁니다”(‘귤’ 부분)

시는 무엇보다도 귤을 쥔 자가 한 알의 귤을 다 차지하려 들지 않고 “칼을 들이밀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부드럽게” 쪼개 “열 개의 귤조각”으로,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다섯으로”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고 일러준다. 한 알의 귤을 쥔 자가 그것을 오직 그만의 소유라고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한심한 착각이다. 작은 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몇 사람의 몫을 마련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렇게 할 때야 ‘만져지는’ 귤 그 자체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고 시는 말한다. 그때 손가락 끝이 “누렇게 물”들었다면 그것은 귤을 “너무 많이 만”져서인 탓도 있겠지만, 외로운 세상을 다정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오늘의 잔양”이 손가락 끝에 내려앉은 탓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한 개의 귤이 열 개로 불어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한 알의 귤을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 여럿이 나누어 먹는 일을 ‘실제로’ 하는 것. 이것이 함께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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