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양경언의 시동걸기
이종민 지음 l 창비(2021)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파종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파종’이라는 말을 다시 본다. 작물의 번식에 쓰일 종자를, 씨앗을 땅에 심는 일. 우크라이나는 식용유의 재료이기도 한 해바라기 씨앗을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자, 보리와 옥수수의 생산량은 세계 3위, 밀은 6위에 이를 정도로 넓은 곡창지대를 품은 곳이다. 그 덕분에 ‘세계의 빵 바구니’라는 따뜻한 별칭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는 특별한 감흥을 일으킨다. 온갖 무기가 가하는 폭력과 무차별적인 공격 속에서 그곳 농민들이 두 손으로 총을 드는 대신에 씨앗을 소중히 품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 농민은 지구 곳곳의 많은 이들이 먹고 살아가는 일에 그리고 자연이 순환의 질서를 따르도록 하는 일에, 지금 세상이 생명을 귀하게 여기도록 하는 일에 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놓지 않고 있다. 다른 무엇이 아닌 ‘씨앗’을 땅에 심기 위해 목숨을 건다.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다. 인간인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하는 건 무엇인가. 이 막막한 질문에 이종민의 시는 관념적인 답을 내놓기보다는 “오늘은 오늘의 질문을/ 내일은 대답을 기다리러”(‘가늠하다’) 지금 꾸려진 생활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응한다. 체념하듯 일상에 매몰되는 태도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심하며 일상을 꾸려가는 태도는 엄연히 다르다. 이종민의 시는 후자에 속한다. 누군가에게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글러버린 상황으로 판단되는 곳일지라도 시는 그곳으로부터 고개 돌리지 않고 어떻게든 손써봐야 할 지점에 도착하려 한다.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여기는 마음을 지킨다. “자, 이것이 내 마음입니다/ 정수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겸손과 예의로 다가가고 싶었는데// 누군가 꾸어야 하는 악몽을 대신 꿉니다/ 조경을 망치지 않기 위해 나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눈을 쳐다보지 않는 습관을 가꿉니다// 고개를 숙이고 다니면/ 화단 모퉁이에 토사물 같은 것을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아무 꽃도 자라지 않는 화단이 제가 꾸고 싶던 꿈입니다/ 검은 바짓단에 묻은 흙과/ 나란히 앉을 때면// 까딱까딱/ 알 수 없는 발끝의 리듬만으로/ 화단은 완성될 수 있습니다// 가장 시들지 않은 잎을 따다가 낮은 곳에 심었습니다/ 자세를 낮춰야 보일 거예요/ 이것이 저의 방식입니다”(‘정원사의 개인창고’ 부분) 시에서 ‘나’는 시든 꽃이 가득한 화단을 화단이 아닌 다른 의도로 쳐다보는 이와는 상종도 하지 않을 사람 같다. 그런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쁜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이런 마음을 먹는 데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세상이다). 다른 무엇이 아닌 “가장 시들지 않은 잎을 따다가 낮은 곳에 심”어 “화단”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나’는 간절하다. 어느 정도냐면, 먼저 나서서 “아무 꽃도 자라지 않는” 상태가 될 것을 염려하는 화단의 “악몽”을 “대신” 꿔주고 될 일이라면 그렇게 하겠다 싶을 정도다. 씨앗을 심는 일, ‘화단의 완성’을 사수하는 일. “자세를 낮춰야” 행할 수 있는 이 일들은 삶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만드는 약속의 형식이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는 살아 있는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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