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성 지음 l 문학과지성사(2021) 시끄럽고 복잡한 속내를 다스리기 위해 온몸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 어떤 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어진 시간을 견디는 방식을 택한다 . 그러니까 무표정은 때때로 다른 이와 상호작용을 하기 위한 적절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이자 ,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모종의 감정이 발설하는 목소리인 셈이다 . 윤은성의 첫 시집 <주소를 쥐고> 를 읽다가 곳곳에서 나타나는 무표정한 얼굴들 앞에서 멈칫했다 . 이들은 마치 “ 정확한지 / 물을 길이 없 ” 어도 그 자리에 묵묵히 있는 “ 정류장에 적힌 배차 간격표 ” 처럼 있다 (‘ 전제와 근황’ ).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바로 그 일이 ‘ 옳은 일 ’ 일지 확신할 수는 없어 그 일을 하는 자신의 표정만큼은 뚜렷하게 결정짓지 못한 상태로 있는 것이다 . 윤은성의 시는 초조와 불안과 근심을 감추려고 무표정에 머물러 있는 이들의 마음이 가진 소리를 키운다 . ‘ 나 ’ 와 ‘ 네 ’ 가 앞으로 어떤 표정으로 움직여나갔으면 하는지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어떻게든 만든다 . “ 그대는 참을성이 좋았었다 . 사전 투표를 독려하는 각별한 안내처럼 ./ 여러 개의 상자를 오가며 / 나는 잠 속 그대의 옷깃을 날마다 만지작거리는 자 . 돌아가 쥐어볼 것이 있다면 그대의 부드러운 옷깃과 / 굵어진 손가락 마디들뿐이다 .// 떠올릴 기억의 상자보다 비난과 피곤의 상자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 ‘ 미래 ’ 가 더는 유효한 어휘가 아닐 때 . 손 뻗어 만져지던 것들이 이제는 만져지지 않고 . ‘ 과거 ’ 로부터의 선로는 망가져 앞으로도 믿을 수 없을 때 . 저물고 다시 맑아지는 날들의 반복만이 조용히 부식되는 시간을 이해하게 하였고 .// 어디에서부터 빛이 와 내려앉고 / 시간을 알리는 기계음이 들려오는 것일까 . 도시는 다 타버리고 말았는데 어째서 나는 멀쩡하고 나의 상자들은 그대론가 ./ 재를 뒤적이는 것이 내게 남은 미래인가 ./ 그대의 참을성이 미처 그려내지 못한 / 우리의 미래인가 .// 멀리로부터 / 총성을 들은 건지 // 아무 소리도 / 듣지 않은 건지 // 분간이 되지 않았다 .// 타고난 이후 길들의 터에서 식별 가능한 방향과 뭉개진 물건들의 용도를 애써 떠올려보고 있었다 ./ 손이 망가질 때까지 , 녹은 그대의 소지품을 / 구별해 던져내고 있었다 .”( 윤은성 , ‘ 정확한 주소’ 전문) 시에서 “ 그대 ” 는 “ 미래 ” 에 대한 기대를 갖는 일이 어렵다고 느낀다 . 그렇다고 “ 과거 ” 를 돌아보는 일이 즐거운 것도 아니다 . “ 그대 ” 는 그대 자신이 앞이나 뒤가 모두 막혀버린 현재에 갇혀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 시간이 흐르는 일을 마치 그 무엇도 나아질 기미 없이 “ 조용히 부식되는 시간 ” 을 “ 이해 ” 하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하는 걸 보면 , 산다고 살아가지만 당장 무엇을 해야 옳은지 좀처럼 모르겠는 상태에 놓인 것 같다 .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 한구석이 “ 다 타버리고 ” “ 멀리로부터 ” “ 총성 ” 까지 들리는 곳에서 살아가는 우리 역시 “ 그대 ” 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 이런 상황에서 시는 우리에게 “ 식별 가능한 방향과 뭉개진 물건들의 용도를 ” “ 떠올려보 ” 자고 말한다 .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 구별 ” 하는 힘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 뭐가 뭔지 구별하고 분간해내고자 애쓰는 움직임이 우리의 표정을 만들고 , 도착해야 할 다음 주소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라고 . 옳은 일이라고 확답할 수 없는 바로 그 이유로 계속 가야 한다고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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