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학술 분야에서도 굵직한 책들이 더 넓고 깊은 지성을 탐하는 독자들을 찾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우선 눈길이 쏠리는 분야는 고전이라 불릴 수 있는 번역서들이다. 서양 철학의 높은 산으로 꼽히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의 저작들이 대거 번역되어 나온다. 이제까지 국내에선 주로 오랫동안 헤겔 철학의 권위자로 자리매김해 온 고 임석진 명지대 명예교수의 번역에 기대어 <정신현상학>(1807) 같은 헤겔의 대표 저작들을 읽어 왔다. ‘헤겔총서’를 펴내 온 도서출판비(b)는 헤겔 전공자 이종철·성창기 번역의 <정신현상학>을 올해 여름께 새로 내놓는다. 여러 사람이 <정신현상학>의 새 번역에 매달리고 있는데, 이 책이 가장 먼저 독자를 찾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도서출판비는 2022년을 아예 ‘헤겔의 해’로 만들 작정이다. 헤겔 전공자로 번역에서 특히 괄목할 성과를 거둬 온 이신철과 함께, 하반기부터는 또 하나의 헤겔 주저인 <논리의 학(대논리학)>(1812~1816)도 전체 4권으로 펴낸다. 올해 말까지는 1권인 ‘존재론’ 1판과 4권인 ‘존재론’ 2판, 2권인 ‘본질론’ 정도를 출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헤겔이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개설하기 위해 쓴 <엔치클로페디(철학강요)>(1830) 가운데 제1부(논리의 학)도 이신철 번역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2020년 일본 학술출판계의 괄목할 만한 성취인 <세계철학사>(전 9권)의 한국어판도 도서출판비-이신철이 함께 만들 기대작이다.
출판사 길은 13세기 서양 중세 후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교황 권력과 교회를 정면 비판하고 황제 권력을 옹호하는 등 근대 정치철학의 싹을 보여 준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의 고전 <평화의 수호자>(1324)를 펴낸다. 라틴어 원전에 입각한 국내 초역이다. 한자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꼽히는 시라카와 시즈카의 한자 사전 <상용자해>(2003)도 올해 길의 기대작이다. 1천여개 한자의 기원과 유래, 변천 과정, 용례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대작이다. 번역자인 박영철 군산대 교수가 한자 세계를 역사적 관점으로 살펴본 저작 <한자의 재구성: 주령시대의 기억과 그 후>도 함께 펴낸다.
새물결은 ‘은유의 해석학’으로 서구 근대를 파고든 독일 출신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근대의 정당성>(1966)을 펴낸다. 그동안 국내엔 낯설었던 블루멘베르크의 대표 저작으로,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과 더불어 전후 유럽의 3대 문제작으로 꼽힌다. 새물결은 또 이미지·미술사 연구에서 기존 곰브리치류의 ‘사조사’를 전면적으로 전복시킨 프랑스 출신 철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잔존하는 이미지>(2002), 세속성에 대한 연구로 서양 근대성을 사유하는 캐나다 출신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주저 <세속의 시대>(2007)도 펴낼 계획이다. 문학동네는 종교사가로서 인류학, 정신분석학, 문화연구를 넘나든 20세기 독창적인 사상가 미셸 드 세르토의 저작 <일상의 발명>(1980)을 펴낸다. ‘도시에서 걷기’ 등 일생생활에서 지배 권력에 맞서는 미시 저항의 실천을 사유한 책으로, 여기서 제시된 ‘전략/전술’ 개념이 유명하다. 사월의책은 ‘유대 민족’이란 정체성이 역사적 근거 없이 ‘발명된’ 신화라는 것을 파헤친 이스라엘 국적 유대인 슐로모 산드의 문제작 <만들어진 유대인>(2008)을 펴낸다. 이 출판사는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인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대표 저작 <자유의 권리>(2014)도 펴낼 계획이다.
현대 철학의 새로운 조류들을 앞장서 소개해 온 갈무리는 이분법을 해체하고 종의 경계를 허무는 전복적 사유를 펼쳐 온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 도나 해러웨이의 저작 <개와 인간이 만날 때>(2007)를 펴낸다. 동물과 인간의 마주침이 갖는 다양한 철학적, 문학적, 생물학적 측면들을 탐구한다. 2021년
세상을 떠난 인지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초기 저작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 있음의 실현>(1979)도 출간 예정이다.
역사 분야에서 푸른역사는 개념사 연구의 기념비적 저작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시리즈를 드디어 끝마칠 계획이다. 2010년 1차분 출간 뒤 10년이 넘게 걸린 프로젝트로, 올해 마지막으로 출간될 21~25권은 <경제> <반동-복고> <도덕> <통일> <협회> 등을 다룬다. 책과함께는 현대 역사학의 거장 에릭 홉스봄의 10주기를 맞아 그에 대한 본격적인 평전 <에릭 홉스봄 평전: 역사가의 삶, 역사된 삶>(2019)을 펴낸다.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에번스가 썼다. 이 출판사는 <신의 그림자: 술탄 셀림의 오스만제국은 어떻게 근대 세계를 만들었는가>(2020) 등 서구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있는 최신의 세계사 경향을 보여 주는 책들도 계속 펴낼 계획이다. 너머북스는 냉전사의 대가 오드 베스타의 강연집 <제국과 의로운 민족>(2021), 청-조선의 관계가 중국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데 어떤 영향을 줬는지 살피는 왕위안충의 <제국의 재건과 조선모델론>(2018) 등 한-중의 역사적 관계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도록 돕는 책들을 펴낸다.
국내 학자들의 치열한 연구 성과들도 두툼한 책으로 독자들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만남’의 철학자 김상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12권을 번역하고 주석한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 ‘형이상학’ 제12권의 번역과 주석>을 길에서 펴낼 예정이다. 5년에 걸쳐 써 내려간 200자 원고지 6천장 분량의 이 대작에서, 김상봉은 신(神)의 문제에 대한 2천년 서양철학사의 주석사를 훑어 내려갈 뿐 아니라 그것이 우리 철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살펴볼 작정이다. 길은 ‘세계철학사’를 꿰어 내는 시도를 펼치고 있는 철학자 이정우의 <세계철학사> 제3권(전 4권)도 펴낸다. 17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근대성의 형성과 변화를 다룬다. 그린비는 스피노자 전공자로서 서양 근대철학을 두루 탐사해 온 철학자 진태원의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을 펴낼 계획이다. 난해하기로 손꼽히는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의 대작 <윤리학(에티카)>(1677)을 직접 번역한 초고를 토대로, 그 핵심에 접근할 충실한 가이드가 되어 줄 전망이다.
돌베개는 국문학자 박희병이 한국고전문학 통사를 강의하는 책 <박희병의 한국고전문학사 강의>를 전 3권으로 준비하고 있다. 건국신화부터 근대문학까지, 실제 강의 녹취록을 토대로 전체 31강을 강의체로 담을 계획이다. 다양한 전공과 위치의 연구자 10명이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그려내며 ‘연구를 한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비평에세이 <연구자의 탄생>도 펴낸다. 푸른역사는 문고본 형태의 <젊은 한국사>(가제) 시리즈로 젊은 한국사 연구자들이 시대 변화에 대한 성찰적 고민을 담아 좀 더 풍부하고 다양한, 구체적인 역사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도록 새로운 장을 열 계획이다. 사회학자 정수복이 10년 동안 작업한 결과물인 ‘한국 사회학의 지성사’(전 4권)도 이 출판사의 기대작이다. <한국 사회학과 세계 사회학> <아카데미 사회학의 계보학> <비판사회학의 계보학> <역사사회학의 계보학> 등으로 이뤄질 계획이다. 문학과지성사는 유리 로트만을 중심으로, 보리스 그로이스, 알렉세이 유르착 등 러시아 문화기호학을 천착해 온 김수환 한국외대 교수가 지난 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문화적 내용물을 꼼꼼하게 따져 묻는 책 <혁명의 넝마주이>를 펴낼 계획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