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양경언의 시동걸기
이현승 지음 l 문학동네(2021) 어느덧 십이월이 되었다는 자각을 새삼 할 때면 ‘올해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이는 아마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촘촘히 떠올리는 일을 막연하게 여기고, 불만족스러운 오늘의 생활을 다그치고 싶을 때 갖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 하루하루 뭘 했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나날들이 긴 시간을 채워 오늘에 이른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하면서 혹은 하지 않으면서 두 번 없이 살아낸 자신의 일 년을 뭉뚱그려 다루진 말자는 얘기다. 대충 생각하다 말면 ‘거기서 거기’인 일들이 실은 거기서 거기일 리 없기 때문이다. 이현승의 시를 읽다가 무엇을 일컫든 ‘거기서 거기’라 쉽게 여기는 일과, 뭐든지 간에 ‘거기서 거기’이지 않을 거라 여기며 다가가는 일은 얼마나 다른 상황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떠올렸다. “오십보백보란/ 이미 손을 더럽힌 사람과/ 곧 손을 더럽힐 사람의 차이 같은 거지만/ 더러움에서 보는 깨끗함이나/ 깨끗함에서 보는 더러움이란/ 또 한없이 먼 거리/ 오십 보는 족히 더 가야 백 보다.// 거기 서 거기란 추격자의 말 같고/ 순간 도주를 상상하느라 잠깐 숨이 가빠지기도 하지만/ 토마토 하나를 고를 때에도 때깔과 향미가 다 다르거니/ 보이는 사람에겐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없는/ 거기서 거기인 토마토// 암에 걸린 사람들이 찾아 먹는 토마토/ 암에 걸릴 것 같은 사람들도 같이 찾는 토마토/ 암 같은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들도 찾는 토마토/ 이렇게까지 말해줘도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생각되는 사람들/ 가만히 있어도 쫓기는 기분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못 알아본 토마토/ 신맛 단맛 짠맛 말고/ 몸에 좋은 맛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토마토들은 가판대 위에 쌓여 있다./ 풋내가 파랗고 기분좋게 난다./ 힘줄 고랑도 예쁘게 파인 채/ 아래는 파랗고 위는 빨갛게 익었다./ 아래까지 붉게 물들 때까지 아직은 기다려준다.// 아직 거기서 거기시겠지만,/ 아직 거기 서 계시겠지만.”(이현승, ‘거기서 거기인 토마토’ 전문) 시는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갖는 함정을 예민하게 짚으면서 시작된다. 그러고 보면 “오십보”와 “백보” 사이에 놓인 거리는 얼마나 아득한가. 오십보를 걸으나 백보를 걸으나 그것이 도망자의 것이라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정도의 차이가 질적인 차이를 만든다. 오십보 간 사람과 백보 간 사람은 분명 다른 곳에 있는 셈이다. 있는 곳이 다르니 둘의 경험 또한 다를 것이다. “토마토”를 고를 때에도 시인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여기는 마음을 경계한다. 다양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토마토”를 먹는다면 아무리 같은 ‘토마토’라도 여기엔 다른 사연이 놓인다. “가판대 위에 쌓여 있”는 토마토 하나하나가 죄다 같은 맛만 낸다고, 같은 색과 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대충 멀리서 훑어봤을 때야 “거기서 거기”인 것이지,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보면 똑같은 토마토는 정말 하나도 없다. 거기서 거기이지 않다. 이는 내 삶을 지금껏 이뤄왔던 하루하루를 돌이키며 떠올릴 생각이기도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다음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궁리할 때에도 새길 필요가 있는 말이다. 멀리서 살필 때는 커다란 하나 같아도 세세히 살피면 거기서 거기이지 않은 상황이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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