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23일 열린 자신의 새 책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출간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창비 제공
진보학계의 원로인 백낙청(83)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가 “촛불혁명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며 “촛불시민이 원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는 실력과 의지, 투철한 역사인식을 가진 2기 촛불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23일 자신의 새 책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출간 관련 기자간담회를 열어 다음 정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백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촛불대항쟁이 아니면 성립할 수 없는 정부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라며 “대통령이나 집권 세력이 촛불을 계승하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은 그 초심을 간직했다고 본다. 하지만 여당 내에서, 또 대통령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촛불혁명의 통로가 되겠다는 마음을 초장부터 얼마나 가졌었는지도 확실치 않고, 뒤로 갈수록 사라졌다고 본다”고 비판했다. 또 “대부분 민주당, 특히 국회의원의 경우는 정권 재창출이나 4기 민주당 정권, 자기 자신의 재선 그런 것이 중요하지 2기 촛불정부는 중요하지 않다”며 “하지만 국민들은 4기 민주당 정권을 원하지 않는다. 2기 촛불정부를 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4기 민주당이 자동적으로 촛불정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현실적으로 4기 민주당이 아니면 2기 촛불정부가 성립되기 어렵다”고도 말했다. 백 교수는 촛불혁명의 성과로 검찰 등 우리 사회의 ‘민낯’이 곳곳에서 드러난 것을 꼽고, 2기 촛불정부의 과제는 “그 민낯에 대해 대응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개혁, 언론개혁, 사법부 개혁, 경제 관료 개혁 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 교수는 현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내비치면서도, 문재인 정부가 이룬 성과도 함께 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백 교수는 “문 정부가 처음 기대에 비해서 실망스러운 면이 있다”며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준비 안된 정부였는데, 그 정부가 이만큼 한 것이 촛불혁명이 아니고 어떻게 가능했겠느냐”고 말했다. 이번 저서의 서장에서도 “문 정부를 평가할 때 잊지 말아야 할 또 한가지는, 그 실적이 아무리 기대에 못 미쳤다 해도 촛불이 낳은 정부가 아니고서는 설혹 문재인보다 훨씬 역량이 뛰어난 인물이 나섰더라고 도저히 못했을 일들을 해냈다는 사실”이라고 썼다. 그 예로는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과 삼성 총수의 구속, 검찰의 기소독점권 폐지, 여순항쟁 관련 특별법 제정을 비롯한 각종 피맺힌 역사에 대한 신원 작업의 진행, 2018년의 획기적인 남북관계 진전 등을 들었다.
자신의 ‘분단체제론’과 관련해서는 “우리 현실을 제대로 보면 분단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고통과 문제점, 적폐가 쌓이고 그런 현실이 반복되는 것은 분단이 체제로 굳어졌기 때문이라는데 착안하지 않을 수 없다”며 “분단체제론은 앞으로 점점 많은 분들이 그 유효성을 인정하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백 교수의 이번 저서는 그동안 백 교수가 ‘근대의 이중과제’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집필했던 글들을 한데 모아 펴낸 것이다. ‘근대의 이중과제’는 근대에 적응하려는 노력과 근대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는 내용으로 분단체제론, 변혁적 중도주의 등과 함께 백 교수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이론이다. 백 교수는 저서 책머리에서 “근대라는 역사적 현실이 점점 난맥상을 더해가는 시점에 유독 이 땅에서는 촛불혁명이라는 민중 주도 민주적 변화의 거대한 사건이 벌어졌다”며 “한국과 한반도가 근대에 대한 적응력을 높임과 동시에 근대를 극복하고 개벽세상을 열어가는 세계사적 작업을 선도할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썼다. 저서 제목에 함께 들어 있는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에 대해서는 “우리의 나라 만들기가 3·1운동에서 꿈꿨던 통일된 독립국가, 근대적 민족국가에는 아직 미달하고 있다. 남북이 점진적이고 단계적이면서 창의적인 재통합 과정을 통해 온전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19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창간해 2015년까지 편집인을 지냈으며, 한국사회 문학·사회 담론을 이끌어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힌다.
한편, 백 교수는 이날 사망한 전두환씨에 대한 소회를 묻는 말에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선인의 죽음이든, 악인의 죽음이든 죽음 앞에서 우리가 삼가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평소에 품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지금 말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안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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