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양경언의 시동걸기
강지이 지음 l 창비(2021) 강지이의 첫 시집에는 ‘궤도 연습’이라는 제목으로 네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사람이 이동하는 데 필요한 수단인 ‘궤도’라는 말 뒤에 ‘연습’이란 말이 어울려 있는 모습을 주의 깊게 살핀다. 누구든지 자신만의 행로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숱한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 지금 있는 여기에서부터 다음에 있을 저기까지의 움직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 닦여 있어야 한다는 것. 어찌 읽으면 낯설게 느껴지는 ‘궤도 연습’이라는 말에는,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연스럽게 이어져왔다고 여기는 ‘이동’이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럽기만 했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네 편의 시 중에서도 ‘궤도 연습 2’를 함께 읽는다. “이곳에서 내리겠다는/ 붉은 불이 켜졌다// 하지만 누른 사람은/ 창밖을 보고 있어// 내리지 않았고// 이미 창밖의/ 크리스마스 불빛들을/ 바라보던 누군가가// 그곳에서 내렸다// 내리는 사람을 보며// 어두운 방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바꿀 때마다 깜빡이던 빨간 빛과/ 초록빛// 함께 웃는 사람들//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던 우리와/ 너의 얼굴로 쏟아지는 창백한/ 빛// 손에 쥐고 잠든 리모컨/ 창밖의 고양이 울음소리로 일어나/ 어두운 화장실의 환풍기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빛으로/ 깨닫게 되는/ 한낮// 다시 이곳에서 내리겠다는/ 붉은 불이 켜진다// 저 멀리 건물 사이로 내일이 지나가고 있다”(‘궤도 연습 2’ 전문) 버스를 탈 때마다 그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 그러나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같은 장소로 이동한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시의 화자 역시 이런 기분으로 있는 듯하다. 버스는 “창밖” 풍경에 붙들리느라 내릴 곳을 놓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하차벨을 누른 그이 덕분에 “누군가가” 내려야 할 곳에 내릴 수 있는 일이 벌어지는 곳. 약속된 노선을 따라 이동하므로 서로가 누군지 잘 모를지라도 함께 ‘같은’ “창밖”의 풍경을 나눌 수 있다. 시에서 화자는 왜 자신이 이동하는 상황을 새삼스럽게 여길까. 화자에겐 별다른 이동 없이 “어두운 방”에서 포착되는 “빛”으로만 바깥 풍경을 감지했던 때가 있어서일까. “텔레비전” 화면이 남기는 잔영, “환풍기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빛”으로만 바깥의 시간대를 가늠해야 하는 이의 사연을 짐작해본다. “내리겠다는” 신호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창밖” “저 멀리 건물 사이로” “지나가”는 “내일”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한 일이자, 이동을 하는 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누릴 법한 일이다.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자원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이들에겐 이 당연한 일도 당연할 수 있도록 싸워서 확보해야만 하는 일이 된다. 지난달 말 서울지하철의 두 개 역을 150여명의 시민이 점거했다. 서울시가 시민들과 약속했던 ‘시내 저상버스 도입’, ‘서울시 지하철 1역사 1동선 엘리베이터 100% 설치’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관련 내년 예산을 전액 삭감하여 편성했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의 현실이 쭉 개선되어 왔던 그간의 맥락에는 이처럼 장애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몸을 던져 이동권 투쟁을 해왔던 시간이 있었던 덕분이다. 이동권은 인권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바꿔나가야 할 궤도가 많이 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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