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l 황금가지(2021) 옛날 옛날에 초기 인류들은 식량의 65퍼센트에서 85퍼센트를 ‘채집’으로 얻었다. 그들은 일주일에 15시간 정도 일하고 괜찮은 최저 생활을 누렸다. 그러자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냥을 나갔고 가끔 고기와 상아를 가지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만 들고 온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도 들고 왔다. 그 결과, ‘차이를 낳은 것은 고기가 아니라 이야기였다.’ 채집하던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다. 내가 귀리를 까고 또 까고 콩을 까고 또 까고. 개울물 좀 마시다가 모기가 물은 데 좀 긁다가… 사냥하러 간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다. 내가 매머드를 발견했는데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까 피가 새빨간 급류처럼 쏟아지고 화살이 눈을 뚫고 뇌를 관통할 때까지 버티다가 결국 매머드는 쿵 쓰러졌는데… 이 매머드 사냥 이야기와 귀리 이야기의 승부는 뻔하다. 매머드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하다. 액션과 스릴과 죽음과 영웅이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귀리 말인데, 귀리를 먹긴 먹었는데 남아 있는 귀리는 어떻게 하지? 내일 아침에 먹을 귀리를 어딘가에 보관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문화에서 ‘그릇’ 이야기가 발견된다. 그릇이라니? 이것은 무기보다 오래된 이야기다. 그런데 온통 무기 이야기만 있는 세상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다. 만약 누군가가 무기를 집어드는 문화에 등 돌리고 싶을 때, 그러니까 인간이 다른 생명과 인간을 학대하고 사냥하고 공격하는 문화밖에는 인간에게 없는 것이냐고 물을 때 감격스럽게도 우리에게는 다른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릇’이 있었다. 나중에 나눠 먹을 음식을 보관하려고, 혹은 그냥 아름다운 뭔가를 보관하고 싶어서 그릇을 만들던 인간이 있었던 것이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이야기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알려주는 것도 이야기, 이러고도 우리가 인간이냐고 묻게 만드는 것도 이야기. 너무나 차갑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리운 것은 인간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도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어슐러 르귄의 <세상 끝에서 춤추다>에 나오는 것인데 르귄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여기 야생 귀리밭과 낯선 곡식 사이에 나와 있는 우리들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문제는 우리 모두가 살해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버렸기에 그 이야기가 끝날 때 우리도 같이 끝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여기 나오는 ‘살해자 이야기의 일부’라는 표현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우리가 ‘죽이는’ ‘이야기의 일부’로 살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어떤 이야기의 일부다. 내가 누구의 어떤 이야기에 등장할지 생각하면 떨린다. 힘이 필요하거나 갈팡질팡할 땐 나에게 묻곤 한다.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이 두 질문을 던지면 복잡해보이던 것이 이상하리만치 단순해지곤 했다. 외로움은 넘치고 사랑과 아름다움은 부족해만 보이던 세상에서 이 두 질문은 중요한 길잡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은 크게 봐선 늘 ‘살리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여전히 귀리를 까고 또 까는 이야기가 덜 흥미진진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시 르귄의 말을 빌리자면 “귀리를 힘들게 까는 순간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기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그릇 안에는 잘 풀리지 않았던 사랑, 눈물나는 실패들이 많기도 한데. 그런데 요걸로도 흥미진진한, ‘살리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단 말인 거지? <CBS>(시비에스) 피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