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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밀라노 지식인, 마키아벨리를 예고하다

등록 2021-08-14 17:29수정 2021-08-14 17:35

[한겨레S] 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
⑧ 피에르 칸디도 데쳄브리오

15C 지식인 중에서도 남다른 부침
120권 이상 저작 집필한 다작가
냉정한 현실정치 가감 없는 묘사
마키아벨리 세계관의 ‘씨앗’ 보여
1447년 8월 중순 데쳄브리오는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주도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 사이에서 진행되던 외교 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페라라에 머물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밀라노로부터 전해졌다. 이내 짐을 꾸린 그는 밀라노로 돌아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는 데 매달리는 한편, 바쁜 일상을 쪼개 자신이 근 30년 동안 섬긴 공작의 삶에 관한 전기를 집필하는 일에 착수했다. 부르크하르트가,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예술품으로서의 국가”라는 15세기 이탈리아 정치세계의 특징이 온전히 이해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던 중요한 저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448년께 피사넬로가 제작한 데쳄브리오 초상 메달의 앞면. 위키미디어 코먼스
1448년께 피사넬로가 제작한 데쳄브리오 초상 메달의 앞면. 위키미디어 코먼스

최고였지만 조금씩 잊힌 지식인

15세기에 명멸했던 수많은 지성들 가운데 데쳄브리오는 남다른 영욕의 부침을 경험했던 흥미로운 인물이다. 고전학자로서 그는 120권이 넘는 저작을 집필하고 번역했던 다산적인 저술가였으며, 타인에 대한 평가에 인색했던 휴머니스트 로렌초 발라조차 그의 승인이 없다면 작품을 출판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당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남다른 권위와 명성을 자랑했다. 하지만 전제군주의 궁정 지식인으로 살았던 인생 역정은 그에게 순탄치 못한 질곡을 선사했다. 필리포 마리아 사망 이후 밀라노에 불어닥친 혼탁한 정국과 뒤이은 정권 교체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이후 그가 권력으로부터 밀려나 로마와 페라라 등의 도시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랜 기간 밀라노 궁정에서 공작의 비서이자 조신으로 활동했던 탓에, 오늘날의 역사가들에게도 그는 지적·정치적 차원 모두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때 최고로 인정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망각된 불운한 지식인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이를 고려하면, 필리포 마리아의 죽음과 그의 일생을 담은 전기는 르네상스 지식인 데쳄브리오를 이해하는 굴곡진 창이 될 만하다. 의미심장하게도 이와 관련해 그는, 인생의 말년에 접어든 1473년 어느 날 자신이 쓴 수많은 작품 가운데 유독 이 전기만이 모든 이에게 악평을 받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 씁쓸한 회고담 아래에 흐르는 속내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이는 공작의 죽음이 자신의 삶에 변곡점이 되었다는 회한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전기에 담긴 솔직한 묘사는 두고두고 그에게 생채기로 남았던 듯하다.

어쩌면 그 전조는 처음부터 도사리고 있었다. 1447년 10월 그와 페라라의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 사이에 오간 서신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데쳄브리오는 출판 전에 권위 있는 이에게 조언을 받으려는 용의주도한 계획 아래 레오넬로에게 전기의 초고를 보냈다. 그런데 그것을 읽은 후작에게 염려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던 듯하다. 무엇보다 동성애와 관련된 공작의 은밀한 사생활을 기록한 것이 레오넬로의 마음에 걸렸고, 이에 그는 해당 내용을 삭제하거나 희석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은 또 다른 편지에서 레오넬로가 수정된 원고를 보고 흡족해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작품은 이 초고의 내용이 순화된 수정본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데쳄브리오의 답변이 흥미롭다. 사망한 공작을 “비난”하기보다 그의 “명예와 영광”을 기리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말하며, 데쳄브리오가 “역사가에게는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 더 비난받을 만한 일은 없다”고 항변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데쳄브리오는 플루타르코스나 수에토니우스 등 고대 전기 작가들의 모델에 따라 필리포 마리아의 삶을 주로 정치적 차원에서 그렸고, 이 점에서 그의 전기는 별반 새로울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고대인들과 달리 그는 공작의 모습을 지나칠 만큼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데만 집중할 뿐 그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내리려 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데쳄브리오를 이전 시대는 물론이고 동시대의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만드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다. 냉정한 현실 정치의 실상이 필리포 마리아에 대한 그의 묘사에 여과 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1441년께 피사넬로가 제작한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초상 메달의 앞면. 위키미디어 코먼스
1441년께 피사넬로가 제작한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초상 메달의 앞면. 위키미디어 코먼스

냉철한 역사가의 변모

데쳄브리오에 따르면 필리포 마리아의 정치적 권위는 다른 무엇보다 그가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기인했다. 통치자로서 필리포 마리아가 스스로를 불가해한 인물로 위장하는 남다른 기술을 통해 ‘무서운 군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갔다는 이야기다. 때론 “부드럽게” 또 다른 경우에는 “포악하게” 조신들을 다룸으로써, 필리포 마리아는 자신의 도시를 일종의 “수형 농장”처럼 만들었다. 모두에 대한 완벽한 통제였다. 한마디로 신민들에게 그는, 한편으로는 그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신임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냉철하고 명민한 군주였다.

마치 가면을 쓴 듯한 그의 모습이 악덕이 아니라 그저 군주의 통치술로 기술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사자’와 ‘여우’의 은유로 훗날 마키아벨리가 제시했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이 여기에 그대로 재현된 듯하다. 후대의 마키아벨리가 현실 정치와 현실 권력의 문제를 ‘이론’적인 차원에서 고구하고 분석했다면, 이 조숙한 ‘역사가’ 데쳄브리오는 스냅사진을 찍듯 그것의 실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후 데쳄브리오는 새롭게 밀라노의 권력을 장악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전기 또한 저술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새로운 군주를 향한 달콤한 아첨만이 흐를 뿐, 냉철한 역사가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권력에서 소외된 궁정 지식인의 애달픈 순응이자 위선이었던 것일까? 낯선 그림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불운했던 이 밀라노의 지식인 데쳄브리오에게서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세계관이 멀지 않았다는 점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데쳄브리오는 브루니의 <피렌체 찬가>를 염두에 두고 <밀라노 찬가>를 저술했다. 1460년대 초반의 필사본이 남아 있는 <밀라노 찬가>의 첫 면. 위키피디아
데쳄브리오는 브루니의 <피렌체 찬가>를 염두에 두고 <밀라노 찬가>를 저술했다. 1460년대 초반의 필사본이 남아 있는 <밀라노 찬가>의 첫 면. 위키피디아

르네상스는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던 지적 운동이었다. 14세기 이후 백가쟁명의 지성사를 검토하는 ‘르네상스와의 대화’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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