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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키케로주의자, 인문 교육의 가치를 제시하다

등록 2021-07-17 16:24수정 2021-08-03 16:51

[토요판] 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
⑦ 휴머니스트 교육가, 피에르 파올로 베르제리오

15세기 초반의 불운한 지식인
뛰어난 고전지식 인정받았지만
정치적 문제 휘말려 명성 퇴색
1502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베르제리오의 <도덕적 품성과 청소년을 위한 교양교육> 사본 일부. 독일 만하임 도서관 소장.
1502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베르제리오의 <도덕적 품성과 청소년을 위한 교양교육> 사본 일부. 독일 만하임 도서관 소장.

1403년께의 어느 날 노년의 살루타티에게 한 권의 책이 도착했다. 남달리 아끼던 제자 베르제리오가 최근 ‘청소년 교육’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쓴 그리 길지 않은 도덕 논고였다. 베르제리오는 이 작은 책자에서 논리와 변증에만 천착하던 당대의 지적 풍토를 비판하면서, 청소년의 덕을 함양하고 올바른 품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고전에 기초한 새로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4세기 후반 페트라르카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고전의 부활을 선도하던 살루타티에게 분명 이 저작은 ‘휴머니즘’의 가치를 교육적 차원에서 해명한 눈부신 성과였다. 이에 그는 주저 없이 베르제리오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노고를 칭송했다.

하지만 제자에게는 스승의 반응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고전 라틴어의 철자법이나 용례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용된 텍스트에 의존함으로써 역사상의 키케로를 곡해했다는 날 선 비판이, 살루타티의 평가 속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 테다. 베르제리오의 답신 역시 무척이나 강경했다. 언제나 “최고의 스승”으로 숭상하던 살루타티가 이번 경우 그에게는 그저 시시콜콜한 어법의 문제에만 매달린 고루한 비판가로 비쳤다. 더욱이 베르제리오는 살루타티가 르네상스의 메트로폴리탄 ‘피렌체’인의 편협한 시각으로 자신을 오해했다는 불쾌감마저 숨기지 않았다.

15세기 초반을 화려하게 수놓은 지식인들 가운데 베르제리오는 가장 불운했던 인물로 손꼽힌다. 1390년대 초반 지식인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을 때, 그는 다른 누구보다 눈에 띄는 수재였다. 뛰어난 고전지식 덕분에 살루타티로부터 믿음직한 후계자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15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로 성장하게 되는 브루니조차 거의 동년배와 다를 바 없던 그를 자신보다 한참 권위 있는 선학처럼 존중했을 정도다. 하지만 베네치아의 영향 아래 있던 작은 도시 출신이었던 탓에 젊은 시절부터 베르제리오는 여러 정치적인 문제에 민감했고, 결국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141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궁정에서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그 결과 1444년 부다페스트에서 숨졌을 때, 진취적인 고전주의자라는 젊은 시절 그의 명성은 그저 전설이 된 지 오래였다.

덕성 있는 시민 양성을 중시하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만은 짙은 여운을 남기며 당대 이탈리아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소위 ‘인문학’으로 불리는 학문분과의 성격과 가치는 르네상스기, 특히 15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조금씩 형성되었다. 고전문헌의 교육적 가치를 설파한 일군의 지식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던 덕이다. 특히 그들은 성직자나 법률가 등 전문직업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던 스콜라주의 교육이, 실용이라는 미명 아래 추상적인 지적 논리에만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인문학에 기초한 여러 교육적 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에 따르면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적 덕성이며, 그것은 결코 논리나 법 혹은 자연철학과 같은 사변적인 지식을 통해서는 길러질 수 없었다.

달리 말해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스트들은 흔히 ‘자유교양학문’(liberal studies)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분과를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능동적인 시민을 기르려고 했다. 베르제리오는 이런 휴머니즘 교육의 이상을 명확한 논고의 형태를 빌려 제시한 첫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회적 유용성에서 교육의 가치가 구해져야 하며, 따라서 그저 개인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 교육과 학문의 목적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396년 살루타티의 후원 아래 페트라르카의 서사시 <아프리카누스>를 편집하게 되었을 때, 그가 철학자가 아닌 ‘시민’ 키케로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베르제리오에게는 키케로야말로 시민적 덕성을 실천한 역사 속의 인물이었고, 따라서 그의 웅변과 수사는 학문이 지향해야 할 목표요 교육이 가야 할 모델이었다.

물론 이는 스콜라주의가 대변하는 이전 세대의 교과를 통해서는 결코 덕성 있는 시민을 양성할 수 없다는 휴머니스트 본연의 믿음에 기인한 생각이었다. 그가 볼 때 고전에 기초한 자유교양학문만이 공동체의 시민에게 필요한 “덕”과 “지혜”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를 고려하면, 설사 미지의 영역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연철학은 무미건조한 사변에 불과했다. 인간의 도덕성과는 무관한 지식의 추구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거미줄”과 “양피지”의 은유를 통해 비판했던 법학에 대한 그의 입장은 더욱 냉소적이다. 그에 따르면 덫을 놓고 늘어진 거미줄처럼 법은 오직 약자만을 먹잇감으로 삼을 뿐이고, 양피지에 쓰인 휘황찬란한 조항들 역시 그저 강자들의 의지만을 대변할 뿐이었다. 법은 결코 인간을 선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에두른 표현이었다.

베르제리오의 고향 카포디스트리아(오늘날 슬로베니아 코페르)에 그의 교육이념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따 설립된 초등학교의 모습. 카포디스트리아시 누리집
베르제리오의 고향 카포디스트리아(오늘날 슬로베니아 코페르)에 그의 교육이념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따 설립된 초등학교의 모습. 카포디스트리아시 누리집

시민적 덕성을 기르기 위한
‘자유교양학문’의 가치 옹호
소수 지배자들에게만 유익한
엘리트 교육 아니냐는 비판도

인간의 발전단계에 맞춘 교육이론

이에 따라 그는 스스로 ‘자유학문’이라고 명명한 세 교과가 교육의 고갱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행동과 의무의 “원리”를 다루는 “도덕철학”이었다. 인간으로서 피해야 할 일과 해야 할 일을 규명한다는 점에서, 그에게 도덕철학은 공동체를 위한 일종의 윤리적 처방전이었다. 둘째는 “역사”다. 베르제리오는 도덕철학을 통해 무엇이 인간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관한 올바른 관점을 얻을 수 있다면, 역사는 그와 관련되어 우리가 따르고 피해야 할 구체적인 “도덕적 사례”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대중을 설득해 그들을 올바른 삶으로 이끄는 수사의 힘을 강조하면서 “웅변”을 중요한 “시민적” 학문분과의 하나로 예찬했다. 도덕철학, 역사, 그리고 웅변으로 구성된 자유학문은, 베르제리오에게 인간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가장 고귀한 분야였다.

물론 서양의 지적 전통에서 고전에 기초한 자유교양학문이 인간을 덕에 이르게 하는 최고의 교과라는 생각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베르제리오의 생각 속에는 르네상스 특유의 시대상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그가 단순한 지적 활동뿐만 아니라 육체의 단련과 음악적 기예의 교육적 효과 역시 강조했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른바 지덕체의 조화를 강조한 그리스 교양 교육의 이상이 휴머니스트 고전학자의 입을 통해 비로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그가 ‘청소년기’라는 특정 발달 단계에 주목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자기만족”에만 집착하는 청소년기의 인간은 “성적 리비도”에 쉽게 굴복하는 불안한 존재다. 그가 “로고스”와 “에토스” 그리고 “파토스”, 즉 이성과 윤리 그리고 정서의 측면을 모두 고려한 전인적인 교육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튼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의 발전 단계에 주목하고 그에 맞춘 교육이론을 제시했다는 점은 분명 시대를 앞선 생각이었다.

군주를 위한 엘리트 교육이라는 비판

하지만 오늘날의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자못 인색하기 이를 데 없다. 이는 무엇보다 베르제리오가 강조한 인문 교육이 자신이 오랜 기간 섬기던 파도바 군주의 후계자를 위한 엘리트 교육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그 스스로 ‘자유교양학문’이 생존을 위해 노동에 의존해야 하는 보통사람들이 아니라, 말뜻 그대로 그러한 질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선택된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신성로마제국 궁정에서 인생 후반부를 보냈다는 남다른 이력도 그에게 엘리트 군주주의자라는 혐의가 덧씌워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베르제리오는 말과 속이 달랐던 허울뿐인 이론가였을까?

흥미롭게도 베르제리오는 인간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청소년기의 인간이 그렇듯이, 그에 따르면 본래 인간은 정념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존재이고 따라서 그러한 인간들이 모인 사회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가 개별 인간의 덕을 함양함으로써 공동체의 안정과 발전을 고구하려 했던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 것이다. 일견 그가 공화주의자로, 또 다른 경우에는 군주주의자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다. 한마디로 베르제리오는 어떤 제도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어떤 특정한 정치체제도 선호하지도 않았다. 제도나 체제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품성만이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고전 교육을 통해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거기에서 출발했다. 역설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하게, 인간을 가변적 존재로 간주하는 르네상스 인간학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다.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르네상스는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던 지적 운동이었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나 학문에 대한 르네상스기의 여러 논의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정치와 권력 그리고 사상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14세기 이후 백가쟁명의 지성사를 검토하는 ‘르네상스와의 대화’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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