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이민하 지음/문학과지성사(2021) 다큐멘터리 <그레타 툰베리>(나탄 그로스만 연출, 2020)에 담긴 환경활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표정이 자꾸 떠오른다. 기후위기 시대에 필요한 행동을 일깨워주는 툰베리는 태평하게 말만 앞세우는 각국의 정부와 어른 세대를 향해 정직하게 분노하고, 아파하고, 슬퍼한다. 전 지구의 활동가들과 연대하고 있다 해도(한국에서도 ‘청소년기후행동’을 비롯한 어린이, 청소년들이 기후위기 문제로 저당 잡힌 미래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사안의 엄중함에 비해 여전한 많은 이들의 무관심·무책임과 싸우는 한 사람의 우울감과 고립감은 그 깊이가 상당했다. 영화는 이 진짜 표정과의 진지한 대면을 통해 관객이 기후위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끔 한다. 숨길 수 없는 표정과 마주한다면 그 누구도 그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이민하의 다섯 번째 시집 <미기후>에는 그간 비밀을 마치 손에 꼭 쥔 공깃돌이나 된 듯 가지고 놀며 시를 썼던 시인이 혹여 놀이처럼 보일지언정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표정은 장난일 리 없다고 말하는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여기, 악몽의 조각들을 오려붙여 만든 시를 함께 읽는다. “어떤 날에 우리는 철없이 병이 깊었다/ 일요일인데 얘들아, 어디 가니?/ 머리에 불이 나요/ 불볕이 튀는데 없는 약국을 헤매고// 창가에는 화분이 늘었다/ 좋은 기억을 기르자꾸나/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고 눈 코 입이 만개할 때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생크림을 발라줄게/ 촛불을 끄렴 나쁜 기억의 수만큼// 전쟁을 줄입시다/ 담배를 줄이듯// 징집되는 소녀들은 머리에 가득 초를 꽂고/ 꿈자리에 숨어도 매일 끌려가는데/ 우리의 무기는 핸드메이드// 페이퍼에 혼잣말을 말아 피우는 저녁// 사는 게 장난 아닌데 끊을 수 있나/ 몸값 대신 오르는 건 혈압뿐이구나//(중략)// 욕실로 들어간 엄마가 머리를 자르며 말했다// 애들이 깨지 않게 조심해요/ 애들은 귀가 밝으니까/ 기억한 건 잊지도 않으니까// 창가로 나온 아빠가 꽃가지를 자르며 말했다// 애들이 비뚤지 않게 손봐야겠어/ 애들은 눈치가 빠르니까/ 못된 건 잘만 따라 하니까// 우리는 금세 어른이 되었고/ 나쁜 기억을 끊었는데 불행한 기분이 든다/ 그건 좋은 기억도 함께 잘려나갔기 때문이야/ 실수로 베인 곳이 쓰라렸지만// 우리는 문득 표정을 잊었고/ 피가 묻은 귀를 가볍게 닦으며/ 어떤 밤엔 병적으로 철이 들었다”(이민하, ‘가위’ 부분) 시에서 “엄마”와 “아빠”는 “우리”가 “기억한 건 잊지도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 “나쁜 기억”은 싹둑 잘라 내려 하고, 세상사에 대해선 눈 가리고 아웅 하게 만들려 한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부정의를 딛고 자라나는 이에게 “불행한 기분”은 끊어낼 수 없는 것. “장난 아닌” 삶이 “우리” 머릿속에서 함부로 가위질된 세상과 충돌한다. 그러니 “문득 표정을 잊었”다는 말은 끝내 숨길 수 없는 표정이 “우리” 내부에 도사린 채 곧 나타나리라는 예고일 수 있다. 심상치 않다. 우리는 우리의 표정을 사수해야만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이들의 절박한 외침을 시로부터 듣는다. 한동안 시집 제목인 ‘미기후’를 아무래도 도래할 위험의 신호일 수 있는 어떤 이들의 표정을 놓쳐선 안 된다는 의미로 읽게 될 것 같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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