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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왜 노동인권 조례 없나요”…대구 청소년들, 제정 공론화 몸짓

등록 2021-11-17 05:59수정 2021-11-17 09:09

보수단체 등 반발로 2017년부터 번번이 무산
지난달 ‘노동인권’을 ‘근로권익’으로 바꾸자 첫 통과
대구청년유니온 등, 청소년들과 조례 제정 움직임
청소년 노동인권을 위한 대구시민행동 ‘초록보리’는 지난달 26일 청소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를 마련해 ‘문제 나무’를 그리고, 직접 필요한 조례 내용을 적었다. 대구청년유니온 제공
청소년 노동인권을 위한 대구시민행동 ‘초록보리’는 지난달 26일 청소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를 마련해 ‘문제 나무’를 그리고, 직접 필요한 조례 내용을 적었다. 대구청년유니온 제공

지난달 대구에서 처음으로 서구의회가 ‘일하는 청소년을 위한 조례’를 제정했다. 대구에서는 2017년부터 청소년노동인권 조례를 제정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지만, 보수단체 등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했다. 서구의회의 조례 제정을 계기로 청소년노동인권 조례를 다른 자치단체들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대구지역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움직임도 일고 있다.

번번이 조례 제정 실패…‘근로권익’으로 바꾸자 통과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가운데 대구교육청과 경북교육청에만 노동인권교육 조례가 없다. 대구에는 광역자치단체 10곳에서 제정된 청소년노동인권 조례도 없다. 2017년 6월 대구시의회에서 청소년노동인권 조례가 발의돼 상임위에서는 만장일치로 통과됐지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구의회들 상황도 비슷하다. 2017년 2월 달서구의회에서 처음으로 청소년노동인권 조례가 발의됐지만, 기독교 및 보수단체 등이 구의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노동권만 가르쳐 계급투쟁 이념을 주입한다’, ‘우리나라 인권법은 부도덕한 동성애를 보장한다’는 등의 주장을 담은 문자 폭탄을 보냈다.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구의원들은 ‘근로기준법이 잘돼 있어서 조례는 필요 없다’, ‘사업주에게 부담을 준다’, ‘청소년들은 학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등의 논리로 조례안을 반대했고, 조례안은 상임위 단계에서 부결됐다.

같은 해 7월 대구 수성구의회의 시간제 근로청소년 등 취업 보호와 지원에 관한 조례도 두 차례 본회의 상정에 실패한 뒤 결국 부결됐다. 2020년 11월 달서구의회에서 다시 조례가 발의됐지만, 같은 이유로 부결됐다. 지난달 대구 중구의회에서 발의된 조례도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달 22일 대구 서구의회에서 ‘청소년 근로권익 보호 및 증진 조례’가 통과됐다. 대구 서구의회 제공
지난달 22일 대구 서구의회에서 ‘청소년 근로권익 보호 및 증진 조례’가 통과됐다. 대구 서구의회 제공

그러다 지난달 22일 대구 서구의회가 ‘청소년 근로권익 보호 및 증진 조례’를 통과시켰다. 조례안 이름에서 ‘노동인권’을 빼고 대신 ‘근로권익’을 넣은 결과였다. 조례를 대표발의한 이주한 대구 서구의원(더불어민주당)은 “그동안 반대해온 단체들이 노동인권이라는 단어 때문에 반대했던 건가 싶어서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조례는 △청소년 고용 사업장을 점검하는 근로권익지킴이 운영 △상담체계 구축과 실태조사 △청소년 상대 근로권익 보호교육 등을 담고 있다.

“왜 우리만 노동인권 조례 없나”…청소년들 직접 나서

서구의회 조례 통과 뒤, 대구청년유니온 등이 모인 청소년 노동인권을 위한 대구시민행동 ‘초록보리’는 노동 경험이 있는 만 24살 이하 청소년들을 모아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직접 조례를 만들어보는 ‘청소년 노동인권을 위한 대화장’을 마련했다. 지난달 26일 진행된 ‘대화장’에는 초록보리 활동가와 청소년 10여명이 참여했다.

고교 자퇴 뒤 용돈을 벌려고 패스트푸드점에서 1년 2개월 일했다는 오아무개(19)씨는 “근로계약서를 쓰는 등 법적 절차는 다 지켰지만, 일하면서 겪은 성희롱 등을 하소연하거나 이야기할 곳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대화자에 참여한 청소년들은 함께 ‘문제 나무’를 그렸다. 열매 자리에 “어리다고 무시”, “근로계약서 미작성” 등이 적혔고, 문제의 원인을 쓰는 나무뿌리는 “경력, 나이 문화, 위계, 꼰대”, “노동법 어겨도 처벌이 약함”, “아르바이트에 대한 존중 없음”, “노동 교육 없음” 등으로 채워졌다.

실제 대구청년유니온이 지난 6월부터 두 달 동안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는 만 24살 이하 대구 청소년 1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44.2%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임금을 정해진 날짜에 받지 못했다”(19.6%), “전혀 다른 일이나 부가적인 일을 했다”(11.3%), “휴게시간을 받지 못했다”(11.3%)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33%는 반말을 들은 경험이 있었고, 욕설이나 폭언을 들은 적이 있다는 답도 18.6%에 달했다. 청소년들이 직접 만들어보는 조례안과 관련해서는 △사업주 대상 노동법 교육 △사업주 에티켓 교육 △역지사지 역할극 등 아이디어가 제시됐다. 표준근로계약서를 사업장에 모두 배포하고 사장과 직원이 함께 평등한 문화를 만들자는 약속문을 쓰거나, 사업주의 노동법 위반과 직장 내 괴롭힘, 성희롱 처벌 강화를 제안하는 이도 있었다.

청소년 노동인권을 위한 대구시민행동 ‘초록보리’는 지난달 26일 청소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를 마련해 ‘문제 나무’를 그리고, 직접 필요한 조례 내용을 적었다. 대구청년유니온 제공
청소년 노동인권을 위한 대구시민행동 ‘초록보리’는 지난달 26일 청소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를 마련해 ‘문제 나무’를 그리고, 직접 필요한 조례 내용을 적었다. 대구청년유니온 제공

초록보리는 지난 13일 지방의원, 노무사, 청소년 등 20여명과 조례 제정을 위한 두 번째 대화장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보수단체들과는 반대로, 의원들에게 조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단체 문자를 보내거나, 의원 면담 등 직접 행동에 나서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건희 대구청년유니온 위원장은 “2017년부터 통과되지 못했던 조례가 이번에 처음으로 서구의회에서 만들어졌다.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담아 구의회뿐 아니라 대구시의회에도 조례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공론화하는 활동을 계속할 예정이다. 조례 제정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겠다”고 말했다.

김규현 기자 gyuhy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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