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 허호준 기자
‘이념’의 이름으로 덧씌워졌던 제주4·3이 또다시 이념논쟁에 휘말릴 우려를 낳고 있다. 최근 4·3 희생자 선정 및 재심 과정에서 잇따라 일어난 2건의 사례가 유족과 도민의 관심을 끌고 있다.
국무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이하 4·3중앙위원회)는 지난 20일 출범 22년 만에 처음으로 제주에서 위원장인 한덕수 국무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체회의를 열어 희생자 88명과 유족 4027명 등을 추가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서 희생자 신청자 가운데 3명의 희생자 결정이 논란 끝에 유보됐다. 눈길을 끈 것은 당시 남로당 간부로 알려진 신청자였다. 회의에서는 통합과 화해의 기조에 맞춰 희생자로 인정해야 해야 한다는 의견과 헌법재판소 기준으로는 ‘남로당 핵심간부’는 희생자 범주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의견이 맞선 끝에 추가 검토를 위해 보류됐다. 이 신청자는 당시 미군 문서에 남로당 간부라고 나와 있지만 4·3 무장봉기 발발 무렵 경찰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 12일에는 제주지방법원 형사4-1부(재판장 장찬수) 심리로 열린 4·3 특별재심 과정에서 검찰이 비슷한 이유로 특별재심 대상자 67명 중 4명에 대해 “헌재 기준에 따라 희생자로 인정될 수 있는지 심리가 필요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장 재판장은 “4·3 희생자에 대한 사상검증을 한다는 비판을 검찰이 뒤집어쓸 수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이 시작된 이후 ‘화해와 상생’ 기조로 4·3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 나타난 이들 사례는 자칫 ‘사상검증’ 논란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4·3 희생자 결정 잣대가 되는 이른바 헌재의 기준 때문이다. 헌재는 2001년 9월 4·3 당시 진압에 직·간접 관련 있는 인사들이 제기한 4·3특별법 위헌 청구 소송을 각하하면서 4‧3 관련 희생자 가운데 파괴사태 가담자나 남로당 간부, 무장봉기 주도자 등을 희생자의 범주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달았다.
4·3중앙위원회는 이 기준에 따라 ‘희생자 제외 대상’을 “△4·3 발발에 직접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 등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 자로서, 현재 우리의 헌법체제 하에서 보호될 수 없다 할 것이므로 희생자의 대상에서 제외토록 하되, 이 경우 그러한 행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희생자들의 위패를 모신 위패봉안실, 허호준 기자
이런 기준에 따라 희생자 신청을 했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신청을 철회한 희생자가 10여명이 넘는다. 제주4·3평화공원 내 각명비에 이름이 새겨졌다가 지워지거나 희생자 신청을 하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이 때문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상당 부분 진척된 상황에서 20여년 전의 헌재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지역의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재가 ‘순수한 희생자’라는 범주를 만들었지만 폭력은 상호관계 속에 상승하기 때문에 논리상 맞지 않는다”며 “4·3특별법에 희생자를 배제하는 규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며 희생자 결정 기준의 변화를 촉구했다.
제주4·3연구소 관계자도 “4·3 당시 무고한 주민들에 대해 법적 절차 없이 반인륜적 학살을 감행한 군·경, 서청의 지도부도 똑같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자들이 아니냐”며 “이런 이유 때문이라도 4·3특별법의 제정 취지와 유족들이 겪는 트라우마에 비춰 이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4·3중앙위원회의 희생자 결정 기준을 새롭게 다듬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덕수 총리는 지난 20일 전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희생자 한 분의 누락도 없도록 희생자를 찾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자 때인 지난 4월 4·3추념식에 참석해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4·3을 기억하는 우리의 책임”이라고 했다.
26일 제주지법에서는 검찰의 ‘헌재 기준’ 부합 여부를 따지기 위한 추가 심리 요구로 4·3 특별재심이 이어진다. 한 명의 희생자 누락도 없이 통합과 화해, 상생의 역사로 나가겠다고 약속한 윤석열 정부의 4·3 문제 해결에 대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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