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연구소가 1992년 4월1일 제주시 구좌읍 중산간 다랑쉬오름 주변 다랑쉬굴에 있는 4·3 희생자 유해들을 살펴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2년 4월1일 제주시 구좌읍 중산간 지역 다랑쉬오름 부근 다랑쉬굴. 겨우 몸 하나가 들어갈 정도인 지름 60㎝ 크기 굴속으로 들어갔다. 손전등을 들고 낮은 포복 자세로 3m 정도 기어가자 3~4평 크기의 공간이 나타났다.
손전등을 비췄다. 4·3 당시 학살된 유해들이 44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0구의 유해가 가지런히 눕혀 있었고, 주변에는 허리띠, 고무신, 안경, 비녀 등이 있었다. 당시 서른살이었던 기자가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유해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두려움보다도 충격이 앞섰다.
굴 안은 음습했다. 몸을 구부리고 엉거주춤한 기자의 머리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3m가량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7~8평 남짓한 공간에 유골 1구가 보였다. 물허벅(제주도 여인들이 물을 긷는 데 사용하는 물동이), 가위, 밥주걱, 요강 등도 있었다. 아궁이처럼 큰 돌 두개 사이에는 가마솥이 걸쳐져 있어, 금방이라도 밥을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유해는 1948년 12월18일 군·경·민 합동토벌 때 희생된 종달리 주민 7명과 하도리 주민 4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여성은 3명이었고, 7살 어린이도 1명 있었다.
수풀 사이에 있는 다랑쉬굴에서는 다랑쉬오름(왼쪽)과 아끈다랑쉬오름(오른쪽)이 보인다. 다랑쉬마을이 있었던 이 지역은 4·3을 거치면서 폐촌돼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허호준 기자
학살이 이뤄지던 날은 흐리고 눈이 흩어지듯 내리고 있었다. 굴을 발견한 토벌대는 이들이 나오지 않자 수류탄을 던지고 수풀에 불을 붙여 굴 안으로 연기를 밀어 넣어 입구를 막았다. 가까운 곳에 있는 오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기가 자욱했다. 이날 밤 주검을 수습하고 44년 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진실을 눌러왔던 채정옥(당시 67, 현재 작고, 구좌읍 종달리)씨는 “굴 안 여기저기 머리를 바위틈에 박고 죽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손으로 흙을 파던 채로 죽어 있었다”고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전했다.
유해 발견 이후 30년 세월이 흘렀다. 굴은 여전히 봉인된 채 말없이 다랑쉬오름을 지켜보고 있다. 유해 발견은 4·3 진상규명운동의 기폭제가 됐고, 굴은 4·3 유적지 답사 필수코스가 됐다. 한 연구자는 “4·3 당시 동굴들은 주민들의 피난처이자 학살터였다. 다랑쉬굴의 유해 발견은 우리나라 과거사 진상규명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고 평가했다.
다랑쉬굴 유해 발견·발굴 30년을 맞아 세미나와 유족들의 증언을 듣는 자리가 잇따라 마련돼 다랑쉬굴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3월31일 오후 제주4·3연구소가 마련한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라는 주제로 열린 증언본풀이마당에서는 다랑쉬굴 희생자 함명립의 여동생 함복순(80)씨가 오빠의 유해가 바다에 뿌려진 날의 기억을 풀어냈다. 당시 유해들은 한꺼번에 화장돼 바다에 뿌려졌다.
“배를 타고 나가 유해를 뿌리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오빠는 날 알아보겠지만 나는 누가 오빠인지 몰라 어떡하지.’ 유해를 뿌리면서 너무나 서러워 눈물이 났어요.”
함씨 가족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렸고, 어머니는 오빠가 희생되기 2주 전인 12월4일 총살됐다. 함씨는 “‘폭도’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찢어졌는데 이제는 ‘희생자’라는 말에 마음이 풀어진다. 오빠 비석이라도 세우고 싶다”며 울먹였다.
제주4·3연구소가 31일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유해 발견 30년을 맞아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라는 주제로 희생자 유족들을 초청해 증언본풀이마당을 열고 있다. 허호준 기자
또 다른 희생자 고태원의 아들 고관선(76·경남 양산시)씨는 “아버지가 도피하자 조부모와 삼촌 등 세분이 1948년 12월21일 총살됐고, 증조부는 이듬해 총살됐다”고 말했다. “다랑쉬굴에서 11구 유해가 발견됐다는 신문 기사 속에서 아버지 이름을 발견하고 신문을 안고 밤새 울었어요. 가장 후회되는 게 화장해버린 것이지요. 여기저기서 압력이 들어와서 화장한 것이잖아요. 몇년만 나중에 발견되거나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고씨는 “고향에서 ‘폭도 자식’이라는 멸시를 받다가 중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터를 잡고 생활했다”며 “다랑쉬굴이 4·3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돼 고맙다”고 머리를 숙였다.
앞서 3월26일 제주언론학회 등이 주최한 ‘다랑쉬굴 발굴 30년, 성찰과 과제’ 세미나에서는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김종민(전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 제주4·3위원회 위원이 당시 관계 당국의 진실 왜곡을 비판하고 “다랑쉬굴 발견과 보도가 ‘희생자의 유해를 양지바른 곳에 안장시켜드리자’는 목표에는 실패했지만, 침체했던 4·3 진상규명운동을 가속했고, 전국적으로 4·3을 알리는 큰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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