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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론에 몰리고, 자취 사라지고…91돌 광주학생독립운동 ‘두 영웅’의 비운

등록 2020-11-03 04:59수정 2020-11-03 09:01

항일 주역들의 쓸쓸한 뒤안길
장석천, 도쿄상과대 자퇴 뒤 귀국…광주시위 전국 확산 주도
고문후유증 32살 숨지고 개발 앞둔 생가터엔 안내판도 없어

장재성, 일 주오대 중퇴 뒤 빵집 열고 비밀모임 토론회 주도
수감됐다 6·25발발 뒤 총살…독립유공자 포상 추천 아직 보류
‘광주사건 준비공판’을 알리는 기사가 실린 1930년 2월15일치 <동아일보> 2면. <동아일보> 갈무리
‘광주사건 준비공판’을 알리는 기사가 실린 1930년 2월15일치 <동아일보> 2면. <동아일보> 갈무리

‘법정에 나선 오십소년(50명의 소년).’

1930년 2월15일치 <동아일보>엔 ‘광주사건 준비공판’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내 아들 내 동생 맛나는(만나는) 광경’ ‘눈이 마조칠 때 눈물만 소사(솟아)’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지면엔 ‘재판소에 밀려온 방청객’ ‘형무소에서 나오는 학생 실은 자동차’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도 보도됐다. 특히 시위 기소자 49명 가운데 장재성(1908∼1950)·장석천(1903~1935) 두 사람의 얼굴 사진을 따로 실어 눈길을 모은다. 두 사람은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시작돼 이듬해 3월까지 전국으로 퍼진 ‘전조선학생사건’의 주요 선동 혐의자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화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던 장석천(1903~35) 선생. 임경석 교수 제공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화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던 장석천(1903~35) 선생. 임경석 교수 제공

전남 완도 출신인 장석천 선생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다니다가 자퇴하고 1926년 10월께 광주로 돌아왔다. 비밀결사 조선공산청년회(공청) 전라도 책임자였던 그는 광주 청년사회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장 선생은 1929년 11월17일 경성(서울)으로 가 격문 2만장을 뿌린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사학)는 “경성 연합거리시위 관련 사실 등은 비밀에 부쳐, 활동한 것보다 형을 낮게 받았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광주가 고립됐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광주 학생시위를 전국화한 대단한 지도자였다”고 말했다.

항일 독립운동가 장석천 선생이 세상을 떴던 광주시 북구 누문동 자택 터엔 문구 대리점이 들어서 있다. 이 일대엔 앞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정대하 기자
항일 독립운동가 장석천 선생이 세상을 떴던 광주시 북구 누문동 자택 터엔 문구 대리점이 들어서 있다. 이 일대엔 앞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정대하 기자

장 선생은 노동조합 운동을 하던 중 붙잡혀 또다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복역 중에 고문 후유증 탓에 병을 얻어 보석으로 나왔다. 그는 32살이던 1935년 10월 광주시 북구 누문동 자택에서 세상을 떴다. 정부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 정문 인근에 있는 그의 자택 터(506㎡)엔 지금 문구용품 대리점이 들어서 있다. 이곳이 장 선생의 자택 터였다는 사실이나 그의 생전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 없는 상태다. 누문동 일대 10만5783㎡(약 3만2천평)의 터에는 30~40층 높이의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라, 고인의 자택은 흔적마저 가뭇없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장재성 선생은 광주 ‘북성정’(北城町) 네거리(현 금남로4가 금남로공원)에 ‘장재성 빵집’을 열어 비밀토론 장소로 활용했다. 정대하 기자
장재성 선생은 광주 ‘북성정’(北城町) 네거리(현 금남로4가 금남로공원)에 ‘장재성 빵집’을 열어 비밀토론 장소로 활용했다. 정대하 기자

장재성 선생의 삶과 죽음은 ‘장재성 빵집’이라는 사적지로만 희미하게 기억되고 있다.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일고 전신)를 졸업한 뒤 일본 주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중퇴한 장재성은 1929년 6월 광주로 돌아온다. 장 선생은 당시 북성정 네거리(현 금남로4가 금남로공원)에 목조가옥을 임대해 호떡을 파는 ‘장재성 빵집’을 열었다. 빵집 2층은 토론회 등 비밀모임이 열렸던 공간으로 알려졌다. 학생 비밀조직이었던 ‘독서회 중앙회’를 이끌던 그는 전남 나주역 한·일 학생 간 충돌(10월30일)을 단순한 ‘패싸움’이 아닌 일제에 대한 항거로 돌린 핵심 지도자였다. 이 때문에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가 가운데 최고 형량인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장재성선생기념사업회가 지난 30일 고인 서거 70돌을 맞아 광주학생독립운동역사관에 세운 장재성 선생 흉상. 장재성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장재성선생기념사업회가 지난 30일 고인 서거 70돌을 맞아 광주학생독립운동역사관에 세운 장재성 선생 흉상. 장재성선생기념사업회 제공

해방 정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을 지냈던 장 선생은 1949년 남로당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광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그는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비극을 맞았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한달 만인 1950년 7월20일께 무등산으로 끌려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총살당했다. 장 선생은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대상자 208명에 포함됐지만, 정부는 ‘해방 뒤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됐다’며 표창을 취소했다. 이후 장 선생 후손은 2018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를 냈지만, 이때도 추천이 보류됐다.

장재성, 왕재일 등 광주고보생 등이 1926년 11월에 조직했던 학생비밀모임 ‘성진회’ 회원들. 원 안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 선생.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제공
장재성, 왕재일 등 광주고보생 등이 1926년 11월에 조직했던 학생비밀모임 ‘성진회’ 회원들. 원 안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 선생.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제공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민간이 선양사업에 나섰다. 장재성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상곤 전 교육부 장관)는 지난달 30일 고인 서거 70돌을 맞아 광주일고 옆 광주학생독립운동역사관에 그의 흉상을 세웠다. 앞서 장재성선생기념사업회는 지난 5월 장 선생 등 73명 서훈 신청서를 보훈처에 냈다.

임경석 교수는 “독립유공자 여부는 오직 순수하게 독립운동 공적 유무만으로 판단해야 한다. 장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보훈처 공훈발굴과 쪽은 “장재성 선생 유족에겐 광복 뒤 실정법 위반 등의 사유로 추천이 보류됐다는 점을 설명했다. 나머지 72명은 심사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대하 김용희 기자 daeha@hani.co.kr

광주 부호 최명구가 1921년 자금을 기증해 지은 흥학관 건물이 있던 광주 동구 광산동 100-21 ‘육층집’ 식당 건물 들머리. 정대하 기자
광주 부호 최명구가 1921년 자금을 기증해 지은 흥학관 건물이 있던 광주 동구 광산동 100-21 ‘육층집’ 식당 건물 들머리.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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