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전남 해남군 해남읍 내사리 인근 논에서 김광수씨가 제9호 태풍 ‘마이삭’ 때 쓰러진 벼를 살펴보고 있다.
“태풍이 온다고 서둘러 벴는데 쭉정이(속이 빈 낟알)가 많이 나와버렸네. 농사는 ‘하늘이 70%, 사람이 30%’라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맞아. 올해처럼 농사짓기 힘든 적이 없었는데.”
지난 4일 전남 해남군 해남읍 내사리에서 만난 김광수(60)씨는 자신의 논이 있는 고천암 간척지를 둘러보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바다를 향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진 고천암 농경지는 누런 빛깔로 물들어 있었지만, 수확을 앞둔 기쁨은 찾을 수 없었다. 태풍을 피해 이달 1일 친환경 조생종 벼를 심은 6.5㏊ 가운데 1㏊를 먼저 수확했는데 쌀 상태가 예년에 비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 김광수씨가 이달 1일 수확한 벼. 하얀 색깔을 띤 낟알은 이상기후로 인해 속이 빈 쭉정이다.
40여년 경력의 농사꾼인 김씨는 “올해 작황은 최악”이라고 했다. 6~7월에 최저기온이 17℃까지 떨어지는 이상저온이 발생하더니, 8월 초까지는 집중호우를 포함한 긴 장마가 이어져 벼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기온이 낮고 비가 많이 내릴 때 생기는 도열병이 심했고, 저기압을 타고 중국에서 날아온 멸구와 혹명나방도 들끓었다. 태풍 ‘마이삭’ 때는 벼가 쓰러지기도 했다.
해남군 화산면 경도리에서 중만생종 벼농사를 짓는 이상철(59)씨도 “올해는 사람뿐 아니라 작물도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중만생종 벼는 날씨 때문에 수확 시기가 10여일 늦춰졌지만 지금까지의 작황은 평년 수준으로 예측됐다. 이씨는 “7월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을 빼서 논바닥에 금이 갈 정도로 말리는 ‘중간 물떼기’를 제때에 못했다. 벼가 늦게 자라기는 했어도 지금부터 햇볕만 잘 받으면 등숙률(낟알이 여무는 비율)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바람이 걱정이었다. 벼는 1m까지 커야 적당한데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웃자랐다. 이삭이 달린 웃자란 벼는 바람에 흔들리면 낟알 무게 때문에 쉽게 쓰러진다. 또 줄기가 꼬여 뿌리에서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백수현상(쭉정이)이 일어날 수 있다. 이씨는 “태풍이 오더라도 비만 내리면 괜찮은데 바람이 거세게 부니까 무섭다. 수확량이 떨어지더라도 정부 비축미 방출 등으로 쌀값은 큰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조량 부족은 남도의 다른 작물에도 악영향을 줬다. 지난달 초부터 수확에 들어간 해남 화산 고구마는 예년보다 줄기당 2~3개가 덜 달렸고, 깨 농사도 작황이 좋지 않다.
4일 해남군 화산면 경도리에서 이상철씨가 올해 잦은 비로 웃자란 벼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해남군농업기술센터는 이상기후에 대비해 ‘드문 모심기’ 기법을 전파하고 있다. 3.3㎡당 모 50주(18㎝ 간격)를 심는 방식이다. 14~16㎝ 간격을 두는 기존 방식보다 벼가 생장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 줄기가 튼튼해진다. 식량작물팀 최영경 기술사는 “농민들은 아직 빽빽하게 심고 비료를 많이 줘야 수확이 늘어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방식은 벼가 튼튼하게 자라지 못하고 쌀에 단백질 함량이 높아져 밥맛이 떨어진다. ‘드문 모심기’를 하면 잎이 질겨 벌레들이 먹지 않고 쌀알도 많이 달려 수확에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해남/글·사진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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