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라이프> 기자 칼 마이던스가 찍은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사진.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딸들. 연좌제는 유족에 대한 저강도 학살이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31살 때 은행에 취직했는데 출근하라는 연락이 없더라고. 알아보니까 신원조회에서 걸렸다는 것이여. 연좌제인지 뭔지 고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살았제.”
충북 청주 고은리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발굴조사 현장에서 만난 박남순(77) 청주·청원 보도연맹 분터골 유족회장은 한 많은 70년 세월을 토로했다. 박 회장의 아버지는 보도연맹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로 1950년 7월7일 군인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박 회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빨갱이 집안으로 몰려 어렵게 살았다. 한밤중에 경찰이 신발도 벗지 않고 집에 들어와 가족들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는 경우는 예삿일이었다. 그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창원 보도연맹 피해자 유족 문강자(79)씨 또한 ‘빨갱이 자식’이라는 소리가 지긋지긋하다. 문씨의 아버지는 1950년 8월8일 갑자기 끌려가 다음날 김해시 생림면 나밭고개에서 희생됐다. 빨갱이 낙인에 농사지을 땅을 얻기도 힘들었다. 문씨 오빠는 동네 유지였던 외갓집의 도움으로 공무원이 됐지만 30여년 동안 한직을 떠돌다 진급도 못 하고 9급으로 퇴직했다. 문씨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빨갱이 손가락질, 삶의 고단함만 남았다. 우리 가족의 원통함은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나”라고 되물었다.
2005년 9월, 서울 종로에서 열린 ‘1945-2005 과거청산 전진대회’에서 진관 스님이 채의진 전국유족협의회 상임공동대표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채 공동대표는 민간인학살규명법 제정 때까지 머리를 깎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16년 동안 머리카락을 길러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대구철도 노조원 간부였던 나정태(73)씨의 아버지는 1946년 10월1일 친일경찰을 채용하고 쌀을 강제로 걷는 미 군정에 항의한 ‘대구 10월 사건’에 참여했다가 1950년까지 복역했다. 같은 해 한국전쟁이 터지자 경찰은 나씨 아버지를 연행했고, 7월6일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처형했다. 어머니는 곧바로 집을 나갔고, 여동생은 남의 집으로, 자신은 큰집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나씨는 1983년 <한국방송>의 이산가족 찾기에서 여동생을 찾았지만 정부의 감시가 시작됐다. 나씨는 “2011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2016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 판결을 받으며 아버지의 억울함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일부 국민은 희생자 유족을 여전히 빨갱이라고 한다. 국민 모두가 희생자 유족의 억울함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2006~2007년 집단희생자 가족 385명의 심리적 피해 현황을 조사한 결과 38.9%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족 대부분은 저학력이었고 40%는 무직이었다. 유족들은 진실규명 후 경제적 배상, 명예 회복, 국가의 공개사과, 추모위령제 순으로 국가의 조치를 요구했다.
노치수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장은 “지난달 20일 통과한 과거사법은 희생자 유족에 대한 배상안이 빠진 반쪽짜리다. 21대 국회에서 논의를 통해 반드시 희생자 유족에 대한 배·보상안이 추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용희 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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